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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Oct 11. 2019

유물론에서 벗어나기 2

1) 상상계 위에 세워진 철옹성, 계급과 종교

인류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조차도 확보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아주아주 오래전, 소위 원시시대라고 불리던 때의 일이다. 지금도 지구촌 어딘가에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이다. 미국과 우리나라를 포함한 몇몇 과잉소비 국가에서 매일 버려지는 음식물들을 식량이 부족한 곳에 제대로 공급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식량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하고도 남을 것이다. 즉, 원시시대와 달리 현재의 식량 문제는 생산의 문제가 아닌 분배의 문제이다.

수렵과 채집을 통해 식량을 구하러 다녔던 원시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여 년 전 밀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고질적인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른바 농업혁명은 인류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농지를 중심으로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했으며, 덕분에 안정적으로 개체수를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석기에서 청동기, 청동기에서 철기로 도구가 발달함에 따라 보편적으로 생산량도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소비하고 남은 생산물, 소위 잉여생산물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계급’이 생겨났다.

계급은 상상계 위에 세워진 첫 번째 철옹성이다.’ 계급 발생 초기에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차이는 미미했지만, 시간이 거듭될수록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려 했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때로는 지배의 불합리성에 대항하는 피지배 계급도 없지 않았겠지만, 지배 계급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정신적 힘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지배를 재생산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배 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재생산하기 위해 취했던 정신적 힘 중 하나는 아마도 자연현상을 이용한 협박이었을 것이다. 21세기 최첨단 과학 문명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도 지진이나, 이상기후로 인한 다양한 자연현상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데, 자연의 규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문명 초기의 피지배 계급은 오죽했겠는가?

농업혁명을 통해 수렵이나 채집을 포기하고 농업에 종속된 인류는 자연현상에 더욱 민감해졌고, 가뭄이나 홍수로 인해 농사를 망치게 되면 지배 계급은 힘없는 피지배 계급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을 것이다. 너희들이 신의 대리자이자 너희들의 지배자인 나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아서 하늘이 노했다고…. 자연현상을 통한 협박에 재미(?)를 붙인 지배 계급은 아예 자신을 신이라고 지칭하거나, 자연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존재에 신적 지위를 부여해 자신만이 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피지배 계급을 세뇌했을지도 모른다. 지배가 아예 없던 시절이었다면 모를까?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이미 익숙해진 상태라면 그 관계의 관성으로 인해 피지배 계급은 그러한 지배 계급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을까?

신석기시대의 어느 날, 달이 태양을 가리는 천문현상이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자. 이미 태양은 그 당시 인류에게 가장 힘이 센 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태양을 낮에는 태양의 빛에 가려 떠 있는지도 몰랐던 달이 가렸다면? 피지배 계급뿐만 아니라 지배 계급도 그러한 자연현상이 얼마나 공포스러웠겠는가? 농업의 발달로 밤과 낮뿐만 아니라 계절의 순환과 우기와 건기 등 기초적인 자연현상을 갓 이해하기 시작한 인류에게 자신이 모르는 모든 부분은 신이 관장하는 영역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배 계급은 그러한 자연현상을 자신의 지배질서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데 적절하게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종교는 상상계 위에 세워진 두 번째 철옹성이다.’ 본격적으로 종교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계급의 발생은 문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계급의 발생으로 인해 지배 계급의 이익에 복무할 다양한 전문 영역이 생겨나게 되었고, 계급 사회라는 긴 터널 속에서 문명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먼저 신과 동격이거나 신과 대화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과 같은 옷을 입을 수는 없었다. 지배 계급을 더욱 위대하게 보이기 위해 옷을 만드는 각종 기술들이 발달했을 것이고, 지배 계급이 치장할 장신구를 만들기 위해 정교한 수공업이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제법 설득력이 있다. 지배 계급의 권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음악, 미술, 건축 등 다양한 예술 또한 발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인문학의 발전을 이끈 자연과학의 성취는 모두가 평등하게 노동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였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약진은 피지배 계급으로 하여금 계급사회가 만든 불합리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그럭저럭 견딜 만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소위 신이 인간을 압도했던 중세시대를 암흑기라고 부른다.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해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지배할 수 있는 물리력을 확보했지만, 그 과정에서 지배 계급의 의도와 무관하게 피지배 계급의 사회적 인식 또한 성장했다. 물리적 지배는 가능했겠지만, 동시에 정신적 지배가 가능하기 위한 장치 또한 끊임없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신화가 등장했고, 보다 정교한 종교가 등장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신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인간적이며 심지어 찌질하기까지 하다.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며, 질투나 복수는 신들의 일상이다. 아마도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의 모습 속에는 그 당시 지배 계급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대통령과 재벌 총수의 도덕성을 문제 삼지만, 그 당시에는 신이나 지배 계급의 도덕성을 문제 삼아 숭배나 지배를 거부할 피지배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이 그들의 수준에 맞는 대통령을 가지듯, 신의 모습 또한 그 시대 대중들의 보편적 인식을 반영한다.

구약에 등장하는 유대의 신 또한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보다 크게 ‘신격적’으로 나아 보이지는 않는다. 구약에 등장하는 유대의 신은 인간처럼 분노하고 질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다. 매우 중요한 차이점은 자연에 존재하는 특정 대상에 국한된 신이 아니라 그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유일신이라는 것? 신화가 지배 계급의 지배를 위한 정신적 자산으로써 그 쓸모를 다 했을 때, 그리고 유대의 신이 가지고 있는 오만함과 편협함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정확한 실체 없이 막연한 상태로 인류의 정신세계에 축적되고 있을 때, 예수가 등장했다.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은 계급과 종교가 향하고 있던 관성의 철옹성이 아니라, 그 관성 속에서 성장해 왔으나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인류의 보편적 상상에 수렴하는 가치였다. 그래서 그 시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피지배 계급은 예수에 열광했고, 예수의 말과 행동은 마치 불치병을 치료하듯 명쾌하게 보였을 것이다. 급기야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과거에 탄압하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리고 인류는 역사상 가장 길고 어두운 중세의 터널로 진입한다.


계급과 종교 외에도 ‘국가와 민족, 법과 질서, 도덕, 규범, 제도 등 문화를 포함한 인류의 문명은 그 자체가 상상계 위에 세워진 단단한 철옹성’이다. 시간과 지면만 허락한다면 위에 열거한 각각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본고에서는 ‘특권’이라는 철옹성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계급이 사라진 자리에 계급과 비슷한 위치에 자리 잡은 ‘특권은 매우 골치 아픈 상상계 위의 철옹성이다.


우리는 특권이라는 상상계가 인정한 철옹성 속에 살고 있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는 통치의 특권을 주었으며, 그렇게 국회의원을 욕하면서도 우리는 국회의원들의 입법 특권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공무원에게는 행정의 집행에 대한 특권을 주었으며, 교사에게는 교육의 특권을 부여했다. 그 특권은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켜 온 장구한 역사와 비교해 보면 눈 깜짝할 새에 등장하여 철옹성처럼 단단해졌다. 문제는 그 특권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 특권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마저 인정하고 있는 특권에 대한 ‘착각’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국민들의 합법적인 투표 결과에 따라 그 특권을 부여받았으니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공무원과 교사는 각각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쟁을 뚫고 시험에 합격했으니 행정과 교육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정말 그러한가?

투표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자신을 뽑지 않은 사람까지도 대표해 통치와 입법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수결’이라는 제도를 상상 속에서 인정한 결과다. 공무원과 교사가 행정과 교육의 권리를 가칠 수 있는 건, 적어도 공무원 시험과 임용고시를 통한 자격의 획득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결과이다. 과거 어느 무정부주의자가 했을 법한 주장을 다시 꺼내 드는 이유는, 현실에서의 특권이 애초에 그 특권이 시작되었을 때 규정되었던 방향성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통치의 특권을 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국회의원 또한 자신의 특권을 유지, 확장하기 위해 가장 열심히 입법의 특권을 사용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비난하는 공무원과 교사 또한 그 특권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문명은 처음엔 모래성처럼 그 형체가 불분명하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단단한 철옹성이 되어 간다. 상상계 위에 세워진 철옹성인 문명은 실재 물리적인 철옹성보다 깨거나 변화시키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문명이 영원불변한 철옹성이었던 적도 없다. 이제부터는 상상계 위에 철옹성처럼 세워진 문명이 어떻게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는지 살펴보겠다.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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