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계 위에 세워진 모래성, 문명
① 중세라는 철옹성에 균열을 가져온 십자군 전쟁
중세 서유럽,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은자 피에르라는 광신도를 이용하여 교묘히 전쟁을 선동한다.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가톨릭교도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전대사를 주겠다고 반포하였다. 그에 따라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 등 여러 쟁쟁한 인물들이 성지를 회복(노략질)하러 떠난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은자 피에르가 엉뚱한 생각을 품고 기사 레이날도, 무일푼의 발터와 함께 한 발 앞서 떠난다. 이를 군중 십자군이라 한다. (위키백과, '십자군')
십자군 전쟁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명분은 예루살렘이라는 성지의 회복이다. ‘10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의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 즉 성지순례 여행을 해왔다. 이슬람의 통치자들이 종교적인 목적의 성지순례를 용인했음에도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를 시작으로 동로마 제국이 점차 쇠퇴하자 서유럽은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중심으로 성지 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안티오키아(안타키아), 예루살렘 등 기독교 성지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단행한다.’ 십자군 원정은 중세 교황의 권위가 최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 권위에 만족하지 못한 교황이 오히려 권위의 확대를 위해 일으킨 원정 전쟁이다. 이는 상상계를 배척해 왔던 서구 실증주의가 과학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의도와 무관하게 상상력에 힘을 불어넣어 준 것과 마찬가지로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원정 과정에서 약탈해 온 유물, 서적들은 당시 암흑시대를 지내고 있던 중세에 큰 영향을 미쳤고, 농업을 기반으로 한 중세의 생산 수단이 상업으로 이동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활발한 상업을 통해 피렌체,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등 도시국가들이 등장하였고, 상업을 통해 성장한 시민계급은 자신들의 재력에 부합하는 지위를 얻기 위해 학술과 예술을 후원했는데, 미켈란젤로를 후원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보티첼리가 1476년에 그린 성화(聖畵)인 동방박사의 경배(Adoration of the Magi)는 주체는 종교적이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메디지 가문의 남자들이다. 즉, 예술의 표현 대상이 신에서 인간으로 이동한 것이다. 신은 하나지만 인간은 그 수만큼 다양하다. 획일한 대상만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표현하며 기술적 발전을 해왔던 예술이 인간이라는 다양한 대상을 주제로 삼으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그러한 문예 흐름이 바로 중세의 어둠을 종식시킨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를 통해 중세라는 암흑의 철옹성은 서서히 무너지고, 근대라는 새로운 모래성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중세 교황이 자신의 권위를 확대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이 가져온 역설적 결과였다.
동방박사의 경배에 등장하는 메디치가 남자들의 이름
1. Lorenzo the Magnificent 2. Poliziano
3. Pico della Mirandola 4. Gaspare Lami
5. Cosimo the Elder
6. Piero the Gouty (Lorenzo’s Dad)
7. Guiliano de’ Medici
8. Giovanni de’ Medici (Piero the Gouty의 동생)
9. Filippo Strozzi
10. Joannis Argiropulos
11. Sandro Botticelli (보티첼리 본인)
12. Lorenzo Tornabuoni
② 성(性)의 금기를 깬 놀란스의 섹시한 음악
얼마 전에 초등학교 4학년 딸과 대화를 하던 중, 자신은 누구처럼 섹시하지 않아서 걱정이라는 말을 듣고는 당황했던 적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성관계를 뜻하는 ‘sex’뿐만 아니라 ‘성적 매력이 있는’으로 해석되는 ‘sexy’는 물론이고, 성과 관련이 있는 일체의 단어는 암묵적 금기어였다. 오죽하면 자신이 어디서 나왔냐는 아이의 물음에 부모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중의적인 답변을 했겠는가? 그 금기를 허물어 뜨린 건 어이없게도 영국의 4인조 여성 그룹 놀란스(Nolans)였다. 4명의 자매로 구성된 놀란스는 1981년 동경 국제 가요제에서 ‘sexy music’이라는 노래를 불러 대상을 받았고, ‘sexy music’의 인기는 곧바로 한국의 음악 시장을 강타했다. 1981년과 1982년은 sexy music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길거리, 라디오, 디스코텍(그 당시 중학생이라 가 보진 못했지만….) 어디를 가든 ‘sexy’란 단어를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정권의 우민화 정책인 3S 정책과 맞아떨어져 더 극성스럽게 대한민국에 ‘sexy music’이 울려 퍼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놀란스는 1982년 서울과 부산에서 두 차례나 내한 공연을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어쨌든 5.16 군타 쿠데타로 시작된 유신 군부독재가 여자들의 스커트 길이를 재고, 남자들의 머리카락을 자르면서까지 무리를 하며 지키려 했던 성적 금기는 전두환 군부의 국민 유화 정책과, 때맞춰 등장한 ‘sexy music’이라는 노래 한 곡으로 인해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렸고, 가장 효과적인 마케팅 무기인 ‘성(性)’을 장착한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은 비로소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질주를 시작하게 되었다.
③ 대만 선거를 움직인 트와이스의 쯔위 사태
한국의 다국적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멤버인 쯔위(17)가 대만 독립 논쟁을 야기시키며 차이잉원(蔡英文) 총통 당선자의 득표율을 끌어올린 것으로 분석됐다.
대만명 저우쯔위(周子瑜)인 그는 지난해 11월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해 대만 국기와 태극기를 함께 흔들었다. 중국 가수 황안(黃安·54)은 최근 이 같은 장면을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올렸고 대만 독립분자로 의심된다고 썼다. 중국에서도 쯔위를 대만 독립분자로 부르며 비판이 거셌다. 쯔위는 결국 지난 15일 밤 유투브를 통해 공개 사과하고 ‘하나의 중국’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대만에서 분노 여론이 강하게 일었고 차이잉원의 표가 더 결집되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대만의 한 정신과 의사는 17일 대만 중앙통신에 “1999년 출생한 쯔위는 대만 사회에서 아이로 인식되며 거기에 여성이었다”면서 “대만인들에게는 그의 사과가 굴욕으로 느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쑤신황(蘇新惶) 대만 중앙연구원 연구원은 대만연합보에 쯔위 사건으로 차이잉원의 득표율이 1∼2% 포인트 올라갔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쯔위 사건’ 나비효과... 대만 대선 차이잉원 지지표 결집?”, <경향신문>, 2016년 1월 17일.)
상상계 위에 세워진 문명의 관성이 얼마나 허약한 모래성인지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얼마 전에 있었다. 한때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쯔위의 대만 국기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쯔위나 쯔위가 소속된 JYP엔터테인먼트의 대표 박진영이 대만의 선거에 의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위해 대만 국기를 흔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목적 없는 행위가 어떠한 목적을 가진 행위보다 더 큰 나비효과가 되어 한 국가의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 다행히 선거 결과를 뒤집을 정도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박빙의 선거였다면, 그리고 그 결과가 쯔위의 목적 없는 행위로 인해 뒤집혔다면 그 파장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쯔위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쯔위의 동영상을 중국에 배포한 ‘황안’은 강한 목적 의식성을 가지고 있었다. 황안의 동영상 배포는 황안의 의도대로 중국인들의 공분을 샀고, 그 공분을 잠재우기 위한 쯔위의 사과가 대만인들의 분노로 이어져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 애초에 쯔위의 동영상을 배포한 황안의 목적과는 반대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처럼 강한 목적 의식성은 그 반발력으로 인해 오히려 ‘도착(倒錯)적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접하게 된다.
위에 열거한 3가지 예 외에도 우리는 단단한 철옹성이었던 문명이 의도와 무관하게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경우를 인류의 역사를 통해 무수히 확인해 왔다. 예수는 기존의 종교적 관성을 지키려는 무리들의 강한 목적 의식성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지만, 죽음 이후 현재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중세의 몰락은 중세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려는 교황의 욕망이 십자군 전쟁으로 표출되면서 시작되었다.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칼 막스의 외침은 자본주의 세력의 전 세계적 단결로 이어지면서 결과적으로 금융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낳았다.
예수는 타락한 신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의 영혼 속에 잠재되어 숨어있던 보편적 기대를 보았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통찰하기 위해 자신의 철학적 지향 반대편에 있던 관념적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을 끌어들였다. 예수와 마르크스의 위대함은 이러한 상상력에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본 것이 아니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 것도 아니다. 현실의 본질을 보았으며, 더 웅대한 통찰을 위해 그 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문명 자산을 활용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상상력은 과거의 당위에 갇혀 있으며, 현실의 이해관계에 묶여 있다.
3. 小結
"앞으로 숙제할 시간은 7~8년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때쯤부터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기 시작할 겁니다. 패닉 상태가 되면 어떤 정책 수단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장덕진,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2016년 2월 11일.)
서울대에서 사회발전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장덕진 사회학과 교수는 희망제작소와 허핑턴포스트 코리아가 공동 기획한 ‘시대정신을 묻는다’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에 대해 위와 같이 비관했다.
비관은 비관을 낳는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의 거센 도전을 물리치고, 전 세계 금융 자본가들을 단결하게 만들고, 신자유주의라는 위명을 떨칠 수 있게 된 가장 핵심적인 동력은 미래를 낙관하는 상상력이다.
현재 인류가 누리고 있는 과학문명의 시작은 대부분 터무니없는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상의 힘은 단지 과학문명의 모티브를 제공한 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한 번 ‘상상’해 보자. 중세 봉건시대 인간은 신으로부터 부여된 계급의 존재를 상상 속에서 인정했기 때문에 누군가는 군림하고, 또 누군가는 지배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겠지만, 21세기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시민들은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은 계급이 아니라 인권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사실 계급이나 인권은 모두 인간의 집단적 상상의 산물이다. 그뿐인가? 이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제도, 관습, 질서, 통틀어서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야 말로 인간의 상상 그 자체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인간들의 집단적인 상상, 즉 소셜 픽션(Social Fiction)이 시장과 경쟁으로 인해 무장해제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상상의 관성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 상상계에 기초 위에 세워진 문명은 때로는 철옹성이 될 수도, 또 때로는 모래성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인류가 처한 상황을 답답한 철옹성으로 인식하느냐, 얼마든지 그 모양을 창의적으로 바꿀 수 있는 모래성으로 생각하느냐는 모두 인간의 상상력에 달렸다. 마지막으로 레비 스트로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문명의 과거이자 현재이면서 미래인 상상계에 대한 헌사(獻辭)를 목적으로 시작했던 졸고를 마친다.
“인간은 언제나 똑같이 잘 생각해 왔다.” (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