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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Jul 03. 2020

포스트 코로나는 오지 않는다!

코로나에서 살아남기 #5

코로나가 장기화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팬데믹 종료를 선언하려면 추가 확진자 없이 2개월이 지나야 한다. 오늘부터 확진자 수가 제로라고 해도 9월 이후가 되어야 포스트 코로나에 진입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로 시작한 2020년, 코로나로 끝을 맺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우리는 post-코로나에 대한 준비가 아니라 peri-코로나에 대한 대응으로 전략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pre-, peri-, post-는 주로 의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증상에 대한 처방 이전, 치료를 위한 처방의 과정, 처방 이후를 구분할 때 사용하는 접두어다. 지금 인류의 경제, 문화 전반을 흔들어대고 있는 코로나도 본질적으로는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이므로 이러한 접두어의 사용이 매우 적절해 보인다. 즉 우리는 현재 peri-코로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필자에 버금가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는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경향신문에서 기획한 7인의 석학에게 미래를 묻는 기획 연제 8번째에 등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래된 규칙은 산산조각 나고, 새로운 규칙은 아직 쓰이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코비드19 이후의 세상은 어떠할 것인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해졌습니다. 확실성은 이제 바닥을 쳤어요. 선택의 자유는 최고치에 다달았습니다. (유발 하라리, 경향신문 기획 연제 “7인의 석학에게 미래를 묻다.” 중)


우리는 산산조각 난 과거의 규칙으로 코로나에 대응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코로나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규칙이 있으나, 최고치에 다다른 선택의 자유가 오히려 그 합의를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바닥을 친 확실성을 부여잡으며 여전히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나씩 짚어 보자. 첫째, 과거의 규칙은 갱년기에 접어들고 있는 자본주의이다. 사실 4차 산업혁명에 들어서며 인류의 생산성 확대에 기여해 온 자본주의의 쓸모는 내리막길에 들어섰다고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농업에 기반한 중세에서 몇 백 년 동안 멸시를 받아가며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산업혁명이라는 날개를 달고 중세를 무너뜨린 부르주아지들의 시대였다. 부르주아지들이 어떤 멸시를 받았는지는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 잘 드러나 있다. 조선시대에도 상인의 위치는 그저 평민의 끝자락이었으며, 노비 바로 위였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목표를 “생산”에서 “이윤”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생산해도 거래를 통해 이윤을 남길 수 없다면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자본은 맹목적으로 이윤을 추구한다. 거기에 옳고 그름의 가치를 대입시키는 것은 지금까지는 유의미했을지 모르나 앞으로는 무의미하다. 자본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가 그렇다는데 어떤 전지전능한 인간이 그 유전자를 바꿀 수 있겠는가? 바꿀 수 없다면 인정하는 것도 답이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세계 500대 글로벌 기업은 전 세계 35억 명의 노동자 중 약 0.15%인 550만 명만을 고용하고도 세계 GDP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본이 단 0.15%의 노동자만을 고용해 전체 생산량의 1/3을 창출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냅 두자. 대신 자본이 원하는 이윤을 창출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노동이 있다면, 그 노동은 세금을 걷어 공공영역에서 창출하면 된다.

그동안 신자유주의를 비판해온 영국 캠브릿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는 코로나로 인해 미국에서는 에센셜 임플로이(essential-employees), 영국에서는 키 워커(key-worker)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야말로 모두가 생존하는 데 기본이 되는 필수 노동을 해 왔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록다운 속에서 이런 말들이 나와요. ‘이제 보니 투자 은행가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의료진, 음식 파는 가게 직원, 배달노동자, 양로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못 살겠구나!’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거대한 빙산이 단단해야 빙산의 일각이 떠오를 수 있다. 수면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를 권력관계로 보지 말고 그저 역할 관계로 볼 수 있다면, 굳이 기를 쓰고 빙산의 일각으로 떠오르기 위해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 이른바 필자가 주장하는 빙산의 역할 이론이다.

권력은 투쟁관계지만, 역할은 연대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둘째, 새로운 규칙은 투쟁이 아니라 연대와 협력이다. 인간은 생존의 문제와 마주하면 경쟁이 아닌, 연대와 협력을 한다. 이는 불확실한 자연의 질서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인류의 조상들이 선택한 방법이기도 하다. 지구를 지배했던 것은 애초에 자연이었다. 자연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동물이 연대와 협력이라는 관계를 통해 ‘이성’을 갖게 되었다. 관계를 통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관계의 밀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 동물적 본성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이성이 생겨났고, 나아가 인지 혁명을 통해 분절적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자연을 관찰한 결과를 언어와 문자를 통해 후대에 전달했다.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었던 자연의 규칙을 이해하게 되면서 지구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이렇게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나게 된 인간은 이익을 중심으로 한 투쟁에 돌입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밝혔던 계급투쟁은 생존 투쟁이 아니라 이익 투쟁이었다. 코로나가 인류의 생존이 아니라 단지 이익과 관련된 문제라면 잘난 인류는 앞으로도 계급투쟁을 계속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인류는 코로나라고 하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불확실한 전파 능력을 보유한 바이러스로부터 생존하기 위한 계급, 계층, 국가, 인정, 성별, 세대를 아우르는 연대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셋째. 불확실성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에 대해 느끼고 있는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는 가히 원시시대 인류가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해 느꼈던 공포에 비견할 수 있다. 원시시대 인류는 왜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자연현상을 신의 뜻이라고 그 원인을 인간의 의지로부터 분리해 인식했다. 인류는 약 1만 년 전, 밀의 유혹으로부터 비롯된 지난한 농경의 과정을 거치며 불확실하다고 느꼈던 자연현상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그 이해가 축적된 것이 바로 문명의 토대가 된 자연과학이다.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류는 필연이라는 인과관계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인류는 자연현상의 불확실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갖게 된 오만을 사회현상의 불확실성에 그대로 적용시킨다. 자연과학의 연구 대상인 자연의 법칙은 지구가 생긴 이래 본질적으로는 변한 것이 거의 없다. 변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류라는 외부 요인에 의한 것이므로 자연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그리고 자연과학은 이미 지구를 넘어 우주를 향하고 있다.
자연과학은 인류와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연을 연구한다. 반면, 사회과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늘 가변적이었다. 지금 우리를 불확실성으로 내 몰고 있는 사회현상, 사회문제, 그리고 그 원인이 원시시대, 중세, 근대, 그리고 근대에서 벗어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동일할까?

이렇게 불확실성을 대하는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태도는 불확실성에 대한 확신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잘 알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답이 있는 문제를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답이 없는 문제에 정답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 더 큰 문제다. 답이 불확실할 땐 모른다고 인정을 해야 비로소 답을 찾을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이 열린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코로나가 그렇다.


코로나가 끝날지, 아니면 영원히 계속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post-코로나에 대한 논의는 마치 시험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상상하며 정작 시험 준비에 몰입하지 못하는 수험생만큼이나 무모하다. 인류는 지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험에 들었다. post-코로나에 대한 준비가 아니라 peri-코로나에 대한 대응으로 전략을 바꿔야 한다. 마치 오늘을 예견한 듯한 마크 트웨인의 명언을 끝으로 peri-코로나에 대한 어설픈 주장을 마친다.


우리가 곤란에 빠지는 건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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