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백수들 (만국의 백수들이여 단결하라!)

백수의 사회학 #16

by 낭만박사 채희태

아무것도 하지 않아 손이 하얗다는 백수 따위가 과연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역사를 지키는 것이 영웅의 역할이었다면 역사를 바꾼 것은 언제나 백수의 몫이었다. 인류가 기차 위에 올라타 끊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철로 위를 질주하고 있다면, 누군가는 기차를 세워야 한다. 기차를 세울 영웅이 없다면 열차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해야 한다. 뛰어내리는 것이 무서우면 지금처럼 코로나로 인해 멈춰 섰을 때 슬며시 내리자. 사람이 내리면 기차는 달릴 목적을 잃는다. 기차가 움직인다고 아무 목적 없이 기차에 올라타는 우를 다시 범하지는 말자. 사실 기차에 올라탄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기차를 세울 수 없다. 아니 기차를 세워야 한다는 필요 자체를 못 느낀다. 기차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기차에 올라타 마땅히 기차 안에서 할 일이 없는 백수들이다.


1980년대 일요일 아침 지금의 586세대를 깨운 것은 스마트폰이 아닌 “은하철도 999”라는 TV 애니메이션이었다. 필자는 일요일 아침 8시에 부모님이 주무시는 방에 몰래 들어가 볼륨을 부모님의 숨소리 크기에 맞춰놓고 “은하철도 999”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 철이는 기계인간이 되기 위해 메텔을 따라 은하철도 999에 탑승하지만, 사실 메텔의 임무는 엄마인 프로메슘의 지시에 따라 기계 제국의 부품이 될 인간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은하철도 999”에 등장하는 우주만큼이나 복잡해진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철이처럼 행선지를 알 수 없는 기차에 무작정 올라타기에 바쁜 것은 아닐까?

"은하철도 999" 극장판 엔딩의 한 장면

기차에 오른 이유를 마땅히 알 수 없다면 과거에 기차를 세웠던 사람들을 한번 떠올려보자. 기차가 없었던 시절 많은 사람들은 역사를 수레바퀴에 비유했다. 생각해 보면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유명한 철학자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은 굴러가는 수레바퀴를 멀뚱히 관찰한 사람들이다. 서양 철학의 초석을 다진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이 농사를 지었는가? 예수가 멀쩡하게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와 백수로 살지 않고, 바리사이파처럼 율법에 빠져 살았다면 기독교가 세계인의 종교가 되었을까? 동양으로 건너와 보자. 필자는 공자나 맹자, 노자, 장자가 당시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동을 했다는 소릴 들어본 적이 없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 싯다르타 가우타마는 뭐 태생이 왕자니 그렇다 쳐도... 물론 필자가 무지해서 그들의 노동을 모를 수도 있다.


영웅이 질서에 순응하는 자라면, 백수는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멈춰 서 있는 자다. ‘토드 로즈’는 “평균의 종말”에서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과거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대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시대에 순응할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되면 영웅이 등장해 시대의 문제를 구조가 아닌 악당에게 전가한다. 그리고 영웅은 시대 구조의 피해자인 악당을 응징하며 자신을 필요성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킨다. 시대는 생산관계라는 단단한 용기(容器)와 상부구조라는 유연한 액체의 결합이다. 하나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은 새로운 용기에 새로운 액체가 담기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면 누군가는 시대에 저항하거나, 누군가는 시대에 적응하거나, 또 누군가는 시대를 벗어나기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모든 시대에는 전(前)시대와 현(現)시대와 탈(脫)시대가 공존한다. 상부구조라는 액체는 생산관계라는 용기 안에서 조금씩 차오르며 비로소 단단한 용기를 깨뜨릴 에너지를 갖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용기는 당연히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수정자본주의를 거쳐 현재는 신자유주의에 이르러 있다. 신자유주의가 만든 양극화의 피해자들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익숙한 고통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고통의 시대를 끝낼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바로 백수들이다. 그러니, 만국의 백수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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