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사회학 #31
만약 코로나가 터지지 않았다면 세계 4대 영화제를 석권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신드롬은 지금까지도 쭈욱 이어졌을지 모른다. 이미 꺼져 재가 되어버린 그 신드롬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사그라든 잿더미 속에서 백수와 관련하여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몇 가지는 파 해쳐 보겠다.
옆집이 쓰고 있는 와이파이에 기생하고, 부업이 아닌 ‘주업’으로 피자 박스를 만들며 지하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송강호 가족은 온 가족이 집에서 놀고 있는 백수 가족이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누가 봐도 부유하게 살고 있는 이선균 가족에 제대로 기생할 기회가 주어진다. 가장 송강호는 능숙한 운전 솜씨와 세련된 화법으로 이선균의 호감을 산다. 송강호의 아내, 장혜진은 지하방에 몸빼바지를 걸친 아줌마에서 고급 주택의 살림을 책임지는 우아한 가정부로 변신한다. 기택의 아들 기우(최우식 분)와 기정(박소담 분)은 이선균의 아내 조여정의 혼을 쏙 빼놓는 탁월한 과외 선생이 된다.
사실 기생충이 다루고 있는 ‘계급’이라는 주제에 몰입해 송강호 가족이 직업도 없이 백수로 사는 불합리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기생충에 등장하는 송강호 가족의 면면을 보며 백수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기회의 문제임을, 또, 백수탈출의 기회가 단지 능력과 관련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준호가 설정한 계급의 메타포인 냄새로 인해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죽고 죽이는 사달이 난다. 계급에 밴 냄새는 금세 지워지지 않는다.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의 냄새를 동경하고,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이 가지고 있는 그 퀴퀴하고 이질적인 냄새를 혐오한다. 그 혐오가 송강호로 하여금 계급에 대한 저항을 유발했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금수저들이 금수저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더 많은 기생충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금수저들은 우리 사회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기생충의 피를 빨아먹으며 존재하고, 기생충들은 다시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금수저에 기생한다. 우발적이기는 하지만 송강호는 그러한 계급 질서에 저항하다가 제대로 된 피해자가 된다. 자본주의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선 그 질서에 저항하지 말아야 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기생하며 사는 것도 답이다. 그래서 더 씁쓸하다. 나 또한 그저 기생충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동시대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은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개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주어진 것들이다. 내가 1619년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누군가는 순응하고 누군가는 저항한다. 한 가지는 분명한다. 저항한다면 그 개인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 그 희생의 결과가 만들어낸 떡고물은 억압에 순응해 왔던 비겁한 인류가 받아먹는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용감한 유전자를 가진 몇몇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나무 위에서 생활하고 있는 동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무 아래를 개척하다 죽어갔다. 나무 아래를 개척한 용감한 유전자들의 희생 덕에 비겁한 유전자는 살아남아 찌질한 그들끼리 또다시 우월과 열등을 나눈다. 그것이 바로 계급이다.
계급사회의 가해자가 될 것인지, 계급사회에 몸을 던져 저항하는 피해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계급사회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는 기생충이 될 것인지...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계급에 대한 입장을 묻는 듯하다. 계급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천태만상 중, 백수는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백수는 계급 질서 속에서 가해도, 피해도, 기생도 아닌 그 질서 자체를 무시한다. 때로는 무엇을 할 용기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용기가 더 필요할 때가 있다.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빨리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도와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백수로 살기 위해선 질서를 무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