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사회학 #18
얼마 전 육아휴직 중인 ‘남자’ 후배를 만났다. 후배는 서울의 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아마 육아휴직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공무원이라는 든든한 직장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과거 몇 년 동안 어공(어쩌다 공무원)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육아휴직이 승진에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거라고 충고했지만, 후배는 자신이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용감하게 육아휴직에 돌입했다. 후배는 평소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로 가사 노동에 적극적인 매우 바람직한 남자로 자부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육아휴직을 하고 보니 그동안 자신의 가사 노동은 분담도, 거들기도 아닌, 그저 쌩색내기였다고 고백했다. 육아휴직에 들어가기 전에는 나름 여유 시간에 그동안 못 읽었던 책도 읽고, 바쁜 직장생활로 인해 하지 못했던 여가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육아를 담당하고 있는 주부에게 자기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고 한다. 한 번은 그 후배를 포함한 지인들과 오랜만에 저녁 약속을 잡았다. 약속을 몇 시간 앞두고 그 후배에게 카톡이 왔다. 그대로 옮겨 보겠다.
“저희 집 바깥양반이 오늘 야근하신다고 해서 저는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 후배의 센스 있는 답변에 카톡을 받은 지인들은 유쾌하게 웃었지만, 뒤돌아 생각해 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성별을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이 여성으로 태어나 결혼을 하게 되면, 그리고 출산까지 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육아의 노예로 살아간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이를 돌보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눈도 뗄 수 없는... 인간은 다양한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한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여성의 인간관계는 엄마와 아이의 관계로 급격히 축소된다. 필자의 옆지기는 출산 후 ‘수렁에 빠진 것 같다’며 울기도 했었다. 부모 중 한 사람은 경제 활동을 해야 하고, 그로서 책임을 다하는 거라는 편협한 사고에 갇혀 있었던 필자는 당시 옆지기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대한민국의 학부모, 그중에서도 특히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거센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아기에서 아이로, 아이에서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부모와 자식이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해야 하는데, 돌아갈 곳이 불투명한 여성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집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육아휴직 기간에 후배에게 주어진 시간은 자신의 시간이 아니었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더욱 심해졌다고 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을 인공지능이 대신해 줄 수 있을까? 2016년 3월 9일, 알파고가 인간 바둑 최고수인 이세돌을 꺾으면서 인공지능 열풍이 불었다. 세계 경제를 전망하는 다보스 포럼에서는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직업을 차지할 거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때는 그 호들갑에 필자도 적극 동조를 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해 노동을 해 주겠다는데 그게 과연 호들갑을 떨 일일까? 인공지능이 필자처럼 백수로 지내고 싶어 한다면 걱정을 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인류는 드디어 농경에서 시작된 고단한 노동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하고, 기계가 인간이 해야 할 노동을 대체한다고 하더라도 출산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아이를 인간 사회의 협력적 존재로 키우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부모의 손길이 필요할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Science Fiction의 상상은 넘쳐나지만 그중 육아에 대한 성공 사례는 아직 소개된 적이 없다. 넷플릭스에 소개된 러드(러시아 드라마, “그녀 안드로이드”에 등장하는 ‘아리사’는 여섯 살 ‘소니아’라는 아이를 첫 번째 주인으로 인증하지만, 인증한 주인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그저 맹목적일 뿐이다. 영화, “I am mother”에 등장하는 기계 엄마는 프로그램된 목표에 맞지 않는 두 아이를 ‘처분’하고 주인공인 세 번째 아이를 키운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도 ‘APX03’이다. 안드로이드가 일상에 깊이 침투한 미래의 모습을 그린 웹툰, “나노리스트”에 등장하는 4살짜리 교육용 안드로이드는 수업종이 치자 자신보다 더 나이가 많은 학생들의 머리를 출석부로 툭툭 치며 자리에 앉으라고 명령한다. 뭐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지식을 전달해 상급학교로 진학시키는 것이 교육의 전부라면 안드로이드만 한 교사가 또 없겠지만...
출산장려금 따위로는 절대 출생률을 높일 수 없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장대익 교수는 공저로 참여한 저서, 『아이가 사라지는 세상』에서 저출생은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진화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출산이, 그리고 육아가 생명을 위협하고 있고, 그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결혼을, 그리고 출산을 안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동명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보통은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가는데, “82년생 김지영”은 도저히 옆지기, 그리고 두 딸과 함께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전에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의 피해를 다룬 “귀향”을 딸과 함께 보는데, 남자로 태어난 것이 그렇게 미안하고 저주스러울 수가 없었다.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의 딸은 영화를 보고 나와 엄마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필자는 그날 저녁 집에 들어와 짤막한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미안하다
내가 인간이라서 자연에게 미안하다
내가 남성이라서 여성에게 미안하다
내가 어른이라서 아이에게 미안하다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들에게 말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그동안 남성들을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성폭력 강의를 들으며 조선시대에 태어났어야 한다고 한탄하는 직장 동료, 보채는 아이 때문에 커피를 쏟은 엄마에게 맘충이라고 비난하는 인격 장애자, 회의 중 여성 비하 발언을 개념 없이 남발하는 직장 상사, 여자 화장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ㄱㅅㄲ는 그래도 비난할 대상이라도 명확하니 사이다 축에 속하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쫓아온 남학생이 무서워 울고 있는 딸에게 옷을 단정하게 입고, 웃고 다니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그리고 아들이 좋아하는 단팥빵을 딸이 좋아하는 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아버지나, 일상의 경계를 애매하게 넘나들며 며느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시어머니나, 육아휴직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불가항력적 사회 구조는 목이 꽉꽉 매이는 고구마 에피소드다.
주인공 김지영이 목놓아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강한 캐릭터였다면, 그리고 남편 공유가 전형적인 ‘한남’이었다면 차라리 영화보기가 편했을까? 막장 드라마를 보듯이 맘껏 욕이라도 하며 영화를 보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기에 김지영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온순하고, 공유는 제법, 아니 꽤 훌륭한 남편이다. 특히 남편 공유의 설정은 작가가 숨겨 놓은 ‘신의 한 수’이다. 남편 공유를 통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남편들의 설 자리를 빼앗는 동시에, 그 불편한 상황의 책임을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로 일반화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을 것이다. 뭔가 상황은 막장인데, 욕을 할 대상이 마땅치 않으니 속은 계속 더부룩해 오는데 트림도, 방귀도 배출이 안 되고 장에 꾸역꾸역 가스만 차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어쩌면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늘 가치의 주장과 신념의 배설을 통해 사회 구조의 책임을 인격화해 특정 개인에게 전가해 왔고, 그래야 쾌변을 본 것 같은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게 정답이 아니었던 거다. 오히려 그로 인해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더 복잡하게 꼬여 왔던 거다. 사회 문제 해결에 정답은 없다.
코로나로 인해 세계가 멎기 전까지 인류는 노동의 목표가 변한지도 모르고 그저 더 많은 잉여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질주했다. 코로나가 지구를 멈춰 세운 지금 우리는 인류의 지속 가능한 번영을 위해 필요한 노동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인터넷의 발명보다 세탁기의 발명이 인류에게 더 혁신적이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노동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가치를 자본이 인정할 수 없다면 공공의 영역에서라도 인정하고, 그 가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가사 노동의 책임을 지고 있는 주부야말로 대체가 불가능한 미래의 “Key Worker”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