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백수들

백수의 사회학 #19

by 낭만박사 채희태

한국을 빛 낸 많은 위인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왜의 침입으로부터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 일제 강점기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한 김구 선생님 등... 그 외에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를 들어보면 많은 위인들이 빼곡하게 등장한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중에는 이완용 등 위인이 아닌 사람도 등장하고, 이수일과 심순애처럼 허구의 인물도 등장한다. 하물며 그 위인들 중에 백수라고 없을 리 없다. 과로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한국을 빛낸 위인들 중에서 백수를 한 번 골라내 보겠다. 이러한 고급진 정신노동을 백수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빨간색 표시는 백수로 의심되는 위인들

이렇게 정리해 보니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중에 백수로 의심되는 분들이 꽤 보인다. 신라의 거문고 명인 백결선생은 집안이 가난해 백번이나 기운 누더기 옷을 입고 다녀 백결(百結)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렸지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동을 하는 대신 거문고를 타 위인이 되었다. 고려 무신정권 시대 7명의 문인들은 죽림칠현을 결성하여 매일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아 당당하게 한국을 빛낸 100명 안에 들었다. 대한민국 최고액권 화폐인 5만 원권의 주인공인 신사임당은 사실상 조선시대 주부 백수였다. 역사가 곽재우와 조헌을 기억하는 것은 당시 관료로서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 백수 시절 임진왜란에 맞서 일으킨 의병 활동 때문이다. 신윤복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단원 김홍도는 임금님의 어진을 그리는 별제(別提)로서가 아닌 일반 서민들의 모습을 풍속화에 담은 백수 활동으로 더 유명해졌다. 기록이 부실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조선 팔도를 발로 누빈 백수였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백수로 방랑시인 김삿갓을 빼놓을 수 없다. 김삿갓이 남긴 주옥같은 시들은 대부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나온다. 넘사스러운 것들이 많아서 차마 여기에는 못 옮기겠고... 김삿갓이 오직 필자에게만 전해준 시가 하나 있으니 최초로 공개해 보겠다. 시가 좀 어려우니 몸풀기를 먼저 해 보겠다. 춘향전이라는 소설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몽룡은 그네를 타는 춘향이를 처음 보고 반해 방자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 보낸다.


左絲右絲中言下心
(좌사우사중언하심)


무슨 뜻일까? 글을 아는 춘향이는 이 글을 보고 이몽룡의 마음을 단번에 알아챈다. 왼쪽(左)에 실(絲)이 있고, 오른쪽(右)에도 실(絲)이 있고, 가운데(中) 말씀(言)이 있고 아래(下)에 마음(心)이 있으면 연모한다는 의미의 戀(연모할 연)자가 만들어진다. 즉, 연모한다는 한자를 이렇게 멋지게 파자(破字)해서 보낸 것이다. 이제 진짜 김삿갓이 필자에게만 전해 준 시를 소개해 보겠다.


義無上部 (의무상부)
二減一數 (이감일수)
言加吾字 (언가오자)
規取左部 (규취좌부)
川水上下 (천수상하)


토익 시험을 볼 때 어설프게 해석을 했다간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를 풀 수 없다. 김삿갓의 시도 마찬가지다. 해석하려고 하면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김삿갓의 시다. 해석이 아닌 파자 풀이를 해 보겠다.


義無上部 (의무상부) : 義에 윗부분이 없다. 즉 我(나 아)가 된다.

二減一數 (이감일수) : 2 빼기 1은 一(한 일)이다.

言加吾字 (언가오자) : 言자에 吾자를 더하면 語(말씀 어) 자가 만들어진다.

規取左部 (규취좌부) : 規의 왼쪽 부분인 夫(사내 부)를 취해 보자.

川水上下 (천수상하) : 내 천(川), 물 수(水), 냇물은 위아래로 흐르니, 流(흐를 류)다.


파자한 글자를 쭈욱 이어서 써 보면, '我一語夫流(아일어부류)'가 된다. 혀의 긴장을 풀고 빨리 한번 읽어 보시라! 사랑하는 연인을 향해~


충신 나라의 간신처럼 간신 나라의 충신은 위인이 아니다. 부패한 조선시대에 난을 일으킨 홍길동, 임꺽정, 홍경래나 탐관오리에 맞서 ‘보국안민’, ‘제폭구민’의 기치를 내걸고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은 시대에 저항한 백수들이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조선을 통치한 일 제국주의에 충성한 이완용이 간신이라면, 간신의 나라를 충신의 나라로 바로잡기 위해 기꺼이 간신이 되어 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광의의 백수들이었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기 위해 밤하늘의 별을 헤아렸던 윤동주나, 지금도 해석이 불가능한 난해한 시를 썼던 이상, 그리고 대놓고 건달로 살았던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백수에 반열에 올려야 하지 않을까?


조선시대 생산된 지적 결과물의 대부분은 위인들의 백수 시절이 없었다면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노래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은 저물어 가는 고려 말기 권문세족에게 정면으로 맞선 혁명가였다. 정도전의 급진적 사상은 고려사회의 기득권 세력인 권문세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아마 관직에서 쫓겨나 백수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왕조 조선의 건국을 상상했을 것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실학자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비롯해 500여 권의 저서를 집필 또는 기획하였는데, 정약용을 백수로 만든 19년의 유배생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백수로 살아가며 ‘고전평론가’라는 새로운 직업을 개척한 ‘고미숙’은 저서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에서 금수저로 태어나 금수저를 버렸던 연암 박지원을 조선시대 최고의 백수였다고 평가한다. 고미숙은 헬조선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청년 백수들에게 노동에서 해방되고, 중독에서 탈출하고, 망상을 타파하는 백수로 살아가라고 제안한다.

차암 편해 보인다.

필자도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제안에 격하게 동의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간이 해 왔던 대부분의 노동은 인공지능에게 떠 넘기면 되고, 소비의 중독에서 탈출할 수 있다면 굳이 비굴하게 ‘지속 가능한 불행 상태’를 강요하는 정규직이 안 돼도 좋으며, 헛된 기대에 현실을 맞추는 망상을 깨고, 현실의 세계로 기대를 끌어내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백수가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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