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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Jan 22. 2021

신문에라도 내가 나왔으니 좋아 죽겠네~ 좋아 죽겠네~

비록 조중동, 아니 한겨레, 경향은 아니지만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가 드디어 일간지, 내일신문에 소개되었다. 재미있게 책을 읽고 있다며 연락을 해 온 한 지인은 "백수과시"가 이 사회의 주류들이 좋아할 책은 아니라며 걱정을 해 주었다. 이 사회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으며 살아온 주류들의 눈에는 백수가 미래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나의 주장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치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정규직들이 자신보다 열등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공정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처럼...


대한민국은 어쩌면 코로나19보다도 더 심각한 "공정 앓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10년 전 "정의 신드롬"을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간의 한국어판 제목도 『공정하다는 착각』이다. 사실 제목에 있는 "공정"이라는 키워드는 샌델이 아닌 출판사의 선택이다. 원래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이다. 영어 무능력자인 내가 굳이 직역을 하자면 "능력(주의)의 횡포 : 무엇이 공동의 선이 되어야 하는가?"로 "공정"보다는 "능력주의"가 주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해석이 잘못되었다면 알려 주세요~)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풍자소설 『능력주의(원제 : The Rise of the Meritocrach, 1870~2033)』에서 처음으로 Meritocracy(능력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재료인 '능력'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논란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능력'이 가지고 있는 긍정성을 앞세워 '능력주의'가 가지고 있는 부정성을 무시해 왔지만...



능력주의는 사실 중세를 무너뜨렸던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사상이었다. 중세 이전에는 능력과 무관하게 혈통이 지위를 결정했다.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보다 찌질한 귀족들을 보며 가슴을 쥐어뜯었을 것이다.

왜 내가 나보다 못난 저들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


귀족과 맞설 물리력을 갖고 있지 못했던 부르주아지는 민중들을 선동해 상인이 주인이 되는 부르주아 혁명을 일으켰다. 부르주아지가 민중을 선동하는 방법으로 사용한 것은 기대와 현실의 조작이었다. 부르주아지들은 혈통에 의해 지위가 결정되는 중세의 계급질서에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영향력을 확대해 온 부르주아지는 혈통이 아닌 후천적 노력으로 지위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러한 부르주아지들의 혁명적 사상은 기층 민중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켰을 것이다. 마치 옆집에 살고 있던 찌질이가 강남에 산 아파트 때문에 떼부자가 된 것을 보며 부동산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우리들처럼...


“이제 아이들은 여전히 특정한 사회적 환경 – 귀족, 상인 혹은 수공업자의 자식으로서 – 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가 나중에 무엇이 될 것인지는 적어도 “원칙적”적으로 출생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시민계급에게 만연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출생의 원칙 대신에 개인의 업적이라는 원칙이 관철된 귀족계급의 특권은 깨뜨려질 수 있으며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상승도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Giesecke, 근대교육의 종말 2002: 28-29).”


다음으로는 현실의 조작이다. 부르주아지들은 굶주린 민중들에게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라고 했다며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땅을 밟기도 전에 이미 장 자크 루소가 '참회록'에서 했던 말이다.


Enfin je me rappelai le pis-aller d’une grande princesse à qui l’on disait que les paysans n’avaient pas de pain, et qui répondit : Qu’ils mangent de la brioche.
최종적으로 나는 빵이 없다는 농부들의 말에 대한 고귀한 공주의 임시방편 - 그들에게 브리오슈를 먹이자! - 에 대해 떠올렸다(장 자크 루소, 참회록).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 갑자기 증폭되면 혁명의 동력이 만들어진다. 배트맨 세계관의 빌런, 조커도 바로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고담시 최고의 갑부 토마스 웨인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정성껏 봉양하고 있는 어머니가 사실은 친모가 아니며, 슬퍼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해피한 정신병이 어렸을 적 어머니의 학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조커의 심정과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올린 프랑스 민중들의 심정은 어떻게 다를까?


사회적 고통은 행동과 그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때, 다른 사람과의 격차가 커질 때 발생한다. 행한 바가 실제 사정과 일치하지 않으면 세상은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재화와 행운이 부당하게 분배되면 세상은 더 이상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말하자면, 기대에 현실이 미치지 못하여 그 ‘간극’이 커질 때 문제가 생긴다. 간극에서 비롯한 불공정, 불만족, 부정의, 불평등은 고통을 참아내기 힘들게 만든다(전상진, 음모론의 시대 2014: 20).


내가 이렇게 매 주장마다 정성껏 배경 자료를 제시하는 이유는 박사도 아닌 빈약한 사회학 석사의, 그리고 꼴랑 한 권의 책을 막 출간한 초보 작가의 자격지심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다면 한낱 백수의 주장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감히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과, 고전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를 나의 졸저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와 함께 비벼보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세 책의 주장을 엮어 몇 가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1. 인간은 과연 공정할 수 있을까?

2. 능력주의는 과연 공정을 위해 작동할까?

3. 백수는 능력이 없는 찌질이들일까?


능력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은 위의 세 책이 모두 유사하다. 다만, "백수과시"는 B끕도 아닌 F끕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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