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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Aug 09. 2021

‘신념’이라는 “이익”

영화, “모가디슈”를 보고…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뭔지도 가물가물하다.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적응에 실패해 헤매고 있는 박사과정 공부와 백수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다양하고 복잡한 도리에 빠져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를 잊고 산 지 오래다. 내가 오랜만에 극장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다. 평소 데면데면하던 대학 동기(심지어 같은 과도 아니고, 정파도 달랐던)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잘 사냐?


자원방래할 붕도 없는 마당에 기대도 하지 않던 친구의 안부 전화를 받으니 묘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백수가 잘 사는지 걱정돼서 전화했냐?
너 사는 건 페북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고 있고, 혹시 모가디슈 봤냐?  
뭐가...디슈? 먹는 거냐?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다.
꼭 보고 감상평 좀 써 봐라.
감상평?
그래, 네가 브런치에 올리는 시덥지 않은 글들 가끔 읽고 있는데, 네가 그 영화 보고 감상평을 쓰면 좋을 것 같아서 전화했다.


이것은 청탁인가, 부탁인가?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영화를 보라니, 거기다 감상평까지? 데면데면했던 친구는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 백수의 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한가한 소리를 전화기 너머에서 던지고 있었다. 현재 청탁을 받은 원고가 2개, 참여하고 있는 연구가 또 2개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이거나 진행을 준비하고 있는 중장기 프로젝트가 3개(4갠가?)에, 토요일마다 월세 마련을 위해 공주 제민천에서 기타강습을 해야 하고, 예고 없이 발생하는 가족 업무에 종중(평강채씨 소감공파 종손이셨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종중 일을 맡기셨다) 일까지... 이럴 거면 차라리 지속 가능한 불행을 감수하고라도 직장을 다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고민을 매일 매시 매분 매초 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내 브런치를 뜨문뜨문이라도 읽고 있다는 친구가 기특하기도 했고, 또 내 처지가 출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백수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죽이느니 차라리 오랜만에 조조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드디어 지금부터는 영화, "모가디슈" 관한 이야기를 해 보겠다. 영화 감상평을 한다고 해 놓고 이렇게 리던던시(요즘 내가 자주 듣고 있는 말이라 굳이 넣어 봤다)한 잡설을 늘어놓는 태도, 몹시 바람직하다. 작은 스뽀에도 경끼가 일어나는 분들은 영화를 먼저 보고 꼭 다시 오시기 바란다. 영화를 보는 건 자유고, 다시 오는 건 필수라는 이야기다.


영화 "모가디슈"의 주제는 분단

모가디슈는 1990년 소말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남북한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이 함께 탈출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1991년 1월 강신성 전 주소말리아대사가 밝힌 소말리아 탈출기. '떼죽음 말자, 손잡은 남과 북', '내전 소말리아서 꽃핀 동포애'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출처:중앙일보)


그리고, 영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깊숙한 주제는 다름 아닌 세계에서 오로지 우리만 맘껏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분단"이다. 날라리 배우 류승범의 형이기도 한 류승완 감독은 2000년 난폭한 액션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입문하더니, 2010년 "부당거래"부터는 사회문제를 스크린에 담는 재미에 빠진 듯하다. 2012년 "베를린"에서 분단 문제로 앵글을 돌리더니, 오랜만에 "모가디슈"에서 다시 분단을 향해 포커싱을 맞췄다.


'반공'이라면 또 몰라도 '분단'은 대한민국 영화판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어왔던 주제였다. 그래서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던져준 충격이 적지 않았다. 강제규와 박찬욱의 차이... "쉬리"가 전통적인 영화의 주제인 사랑에 분단을 살짝 담가 간을 봤다면, 이듬해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분단을 철학의 문제로 접근했다. "쉬리"에서 북한은 테러나 일삼는 악한 존재였지만,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북한은 그저 다른 존재로 묘사된다. "모가디슈"를 보며 "쉬리"보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떠올랐던 이유는 판문점에서 소말리아의 모가디슈로 장소만 이동했을 뿐 두 영화가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분단을 조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포스터

분단이라는 주제가 영화 "모가디슈"의 깊은 저변이라면, 우리에게 주관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주제인 분단을 객관화시켜 철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류승완 감독은 소말리아 내전이라는 프리즘을 소재로 개입시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 굳이 개연성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88 올림픽을 치른 후 UN에 가입하려는 대한민국의 정치적 사정과 UN에서 가장 가장 많은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 그중에서도 내전이 발발한 소말리아는 영화의 주제와 소재를 연결하는 접착제이자 개연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실도 전쟁만큼 잔혹하다

우리가 SF 영화를 아무 죄책감 없이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영웅들의 상대는 악당이고, 악당은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이분법적 설정 때문이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낯 선 듯, 낯 설지 않은 소말리아 내전 상황은 SF 영화에서처럼 영웅이 악당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보는 내내 가슴이 아렸다. 총을 들고 싸우는 장면에선 경험하지 않았던 광주 민주화 항쟁이, 지랄탄이 떨어지는 장면에선 직접 경험했던 대학 시절 가투가 떠올랐다. 그리고 빨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안기부 출신 참사관 강대진(조인성 분)을 통해 소말리아 내전이 진정 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절절하게 느껴졌다.

전쟁은 잔혹하다. 총칼이 보이지 않을뿐, 현실 또한 잔혹하다. 총칼이 보여 전쟁이 더 잔혹한지, 총칼이 보이지 않아 현실이 더 잔혹한지 알 수 없다. 전쟁은 이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서 잔혹하고, 현실은 잘난 이성이 만든 결과라서 잔혹하다. 과거에는 전쟁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았지만, 지금은 현실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죽는 사람이 보편적으로 훨씬 더 많다. 어쩌면 현실은 현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전쟁 같은 잔혹함을 숨기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총칼은 권력을 상징한다.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총을 겨눌 수 있는 것은, 거리와 상점을 불태우며 물건을 탈취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을 향해 맘껏 총질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들이다. 그래서 더더욱 총칼은 그 누구에게도 일방적으로 쥐어주어선 안 된다. 전쟁이 아닌 현실에서도...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통해 돌고돌아 나를 향할지도 모를 그 총칼을 일상적으로 누군가에게 쥐어준다.


"모가디슈"의 신파 콘트롤

상인이 만든 상업영화와 장인이 만든 예술영화의 차이, 보는 동안 재미있으면 상업영화고, 보고 나서도 생각이 나면 예술영화다. 특히 분단을 주제로 한 영화에서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나누는 포인트는 신파를 어떻게 콘트롤하느냐에 달렸다. 우리에게 분단이라는 주제는 얼마든지 눈물을 쏟아낼 수 있는 수도꼭지다. "모가디슈"가 예술영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단을 주제로 다루면서 신파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적어도 상업적인 지향만을 가진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승완 감독은 분단이라는 주제를 돌직구처럼 관객들에게 던지기 위해 과감하게 신파를 포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가든 안 가든 충분히 러닝타임을 확보해 관객들의 눈물을 짜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빠르고, 급박하게 사실적으로 영화를 전개해 나갔다. 인간의 눈물은 양가성이 있다. 솔직한 감정의 표현인 동시에 책임을 피하는 면죄부가 되기도 한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우리는 간편하게 분단을 유지하고 있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눈물로 공감함으로써 관객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극장을 나온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모가디슈"를 보며 가장 울컥했던 장면은 한국 대사관으로 피신해 온 북한 대사관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한국 대사의 옆지기(김소진 분)는 깻잎을 젓가락으로 집지만 두 장이 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던 북한 여성은 젓가락으로 밑에 있는 깻잎을 잡아 주었다. 류승완 감독은 이 사소한 장면에 분단이 가지고 있는 어떤 함의를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적의 도움을 받아 깻잎을 먹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일까, 아닐까? 분단은 어쩌면 과거에는 대단했지만, 지금은 사소해진 어떤 신념의 관성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신념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과거의 신념을 지킴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소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신념'이라는 "이익"


김윤석 : 왜 자꾸 방해공작을 하는 거요?
허준호 : 남조선이야말로 북한이 반군을 지원했다는 헛소문을 내지 않았소?
김윤석 : 북한이 반군을 지원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거요?
허준호 : 알고 싶은 게 진실은 맞소?


우리가 믿고 있는 신념은 과연 진실일까? 과거엔 진실이었을지 모르지만 솔직히 현재에도 여전히 진실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신념이라는 녀석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해방 이후 강대국에 의해 강요된 경제적 신념으로 남과 북이 나뉘어진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독재에 맞서 싸운 학생들이 NL이니 PD니 하며 날을 세웠다. 지금은 남성과 여성이 가부장제와 페미니즘을 사이에서, 어른과 아이가 세상에 대한 다른 인식 사이에서 치열한 대결을 펼치고 있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 보인다.  


처음 그들이 왔을 때 (마르틴 뤼묄러)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사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낭만닥터 김사부는 '욕심'과 '양심'을 헷갈리지 말라고 했다. 혹시 우리는 단지 '이익'을 지키기 위해 부여잡고 있는 '신념'을 '가치'의 문제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와 단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부정하고, 혐오하고, 마침내 소멸시켜야 끝이 나는 이 신념이라는 것이 과연 죽을 수는 있어도 물너설 수는 없을만큼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내가 지켜온 신념이 단지 하찮은 이익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남과 북의 대사관 식구들은 생존을 위해 국가 권력이 일방적으로 부여한 신념을 잠시 접어두고 서로 손을 맞잡는다. 마침내 탈출해 성공해 케냐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한 남과 북의 대사관 식구들... 공항에 남한의 안기부와 북한의 보위부가 마중 나와 있는 것을 본 김윤석은 여기서 작별 인사를 나누자고 말한다. 생존을 위해 잠시 접어 두었던 신념을 다시 장착해야 할 시간임을 상기시킨 것이다. 사선을 함께 넘어온 남과 북의 대사관 식구들은 비행기 안에서 조촐하게(?)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비행기에서 내려 데면데면 각각 남과 북에서 준비한 차에 올라탄다. 차에 오르기 직전 북한 대사 허준호와 남한 대사 김윤석은 잠시 멈칫한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서로 눈인사라도 하고 싶은 '사소한' 욕망을 억누른 채 이내 차에 오른다.


우리의 후손들은 분단을, 그리고 통일을 이야기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존재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을까?


서로 깻잎 먹는 것은 도와줄  있지만, 눈을 마주쳐서는  되는 이상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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