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백수 채희태 Oct 22. 2019

조커(Joker), 어떻게 보셨나요?

영화 “조커”를 보고...

지난 주말에 영화 조커를 보고 왔다.

혼자서,

조조로...

예전엔 영화의 선택권이 나에게 있지 않았다. 옆지기가 보러 가자고 하면 같이 가서 보는 거고, 옆지기가 패쓰하면 나도 굳이 영화를 찾아서 보진 않았다. 그래서 못 본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다. 그래도 가물에 콩 나듯 몇몇 영화는 혼자 보기도 했는데, 최근엔 그 빈도가 부쩍 늘어 아예 역전을 해 버렸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극장에 들어가 둘러보니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적지 않아 보인다.

서로 취향과 시간을 맞춰야 하는 감정의 소비가 날이 갈수록 번거롭게 느껴진다. 차라리 각자 보고 싶은 영화를 따로 보는 게 편하다. 그래도 형식적으로 물어는 본다.

 

조커 보러 갈래?
아니...
알았어, 나 혼자 본다?
응...


한편으론 아쉽지만 다른 한편으론 다행이다. 본다고 했으면 번거로웠을 텐데... 난 조조(早朝)를 선호하지만 옆지기는 만석(晩夕?)을 선호한다. 아니나 다를까 조커를 보고 온 날 저녁 7시가 넘어, 둘째 딸과 “말레피센트2”를 보러 나갔다.


말레피센트 볼 건데...
지금?
응...
둘이 보고 와~


말레피센트는 나도 보고 싶었지만, 일요일 저녁 영화 관람은 왠지 심리적으로 부담이 적지 않다.

평소와는 다른 이러한 시크한 글투는 아마 아침에 혼자서 ‘조커’라는 지독히 염세적인 영화를 보고 왔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내가 영화, “조커”를 보며 느꼈던 생각을 털어놔 보겠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조커처럼 시대가 바뀜에 따라 주인공이 아닌 악당에 주목한 사례가 있다. 다름 아닌 흥부전에 등장했던 악당, 놀부의 케이스다. 농경시대의 인기 캐릭이었던 흥부가 산업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며 대책 없이 아이만 많이 낳은 무책임한 가장의 전형으로 전락한 반면, 놀부는 부와 성공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우리가 대책 없는 악당 조커에 주목하는 이유가 혹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영웅상이 조커이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하더라도 인정하기 쉽지 않은 지점이다. 하지만 지금이 영웅이 사라진 소위 ‘탈영웅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부정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영웅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조커와의 개연성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놀부가 우리의 인정을 받은 지 100년이나 되었다고?

첫째, 사실상 영웅이 해야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영웅이 소멸시켜야 할 악당이 명확히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소멸시켜야 할 악당이 모두 사회의 복잡한 구조 속으로 꼭꼭 숨어버렸다. 조커가 악당이 된 이유가 오롯이 조커 개인의 탓일까? 1980년대 고담시는 청소노동자 파업으로 거리는 온통 쓰레기 장이고, 그 와중에 시장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배트맨의 아버지(토마스 웨인?)는 사회지도층과 함께 자본주의를 풍자한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를 아무 생각 없이 시시덕거리며 관람한다. 참 묘한 대비다. 고담시를 중심으로 영웅 배트맨과 악당 조커의 대결을 그린 과거의 스토리텔링은 더 이상 탈영웅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심장을 자극하지 못한다. 영화 조커는 영웅들을 떼거지로 등장시켰던 마블의 어벤저스와는 다른, 지극히 DC 다운 탈영웅주의 시대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셀 수도 없는 영웅들이 드글드글하게 등장하는 어벤저스

둘째, 대중들은 더 이상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이 시대 대중들은 오히려 영웅의 존재 자체를, 그리고 영웅의 그 기계적 선의 기준을 불편하게 느낀다. 어쩔 수 없이 생존하기 위해 누구나 죄 몇 개씩은 가지고 살아가는데 영웅은 마치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하는 듯하다. 역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영웅이 아니면 모두 죄를 짓고 살아간다. 사실 대중들은 그것도 용납할 수 없다. 나도 죄인이면 영웅도 죄인이어야 마음의 편하다. 그래서 영웅에게 묻는다. 당신은 진정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날 자신이 있느냐고... 비근한 예로 조국 일가가 바로 그래서 털렸고, 대한민국 최고의 앨리뜨인 검찰과 검찰에 기생하는 언론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어 결국 승리(?)했다.


마지막으로 셋째, 영웅과 악당을 가르는 선악의 개념이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원래 선과 악의 의미는 그리스어 아가톤(agathon)과 카콘(kakon)에서 유래했다.


그리스어로 선을 뜻하는 ‘아가톤(agathon)’이란 단어에는 도덕적 의미 외에도 ‘득이 된다’라는 의미도 있네. 반면 ‘악(惡)’을 뜻하는 ‘카콘(kakon)’이란 단어에는 ‘득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있고. 이 세계에는 부정이나 범죄 등 각종 악행이 만연해 있지. 하지만 순수한 의미에서 ‘악’, 즉 ‘득이 되지 않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네. (기시미 이치로. 2014. 『미움받을 용기』.)


지금의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은 딱 두 가지다. 첫 번째, 우리 편이냐, 아니냐. 두 번째,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 이익은 또다시 물질적 이익과 신념적 이익으로 나눌 수 있다.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이 그렇게 된 배경이 없지 않다.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최초의 문민정부를 표방했던 김영삼 정권은 보수의 야합으로 출발했다. 군사정권과 가열차게 투쟁해온 진보진영의 입장에선 김영삼이라는 대통령이 시작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괘가 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진보진영의 입김이 강력했다. 강력한 진보진영과 진보진영의 영향을 받은 대중들은 과거 개발독재와 토건 자본의 결탁으로 인해 빚어진 사고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김영삼 정부에게 물었다. 사실 나도 그중 하나였으니 할 말이 없다. 대통령이 복이 없어서 사고가 터졌다느니 하는 미신적 요소까지 끌어들여 김영삼 정부를 비난했다. 뭐, 워낙 멘탈이 강했던 당사자는 끄떡도 안 했지만...

그러한 방식은 내 편이 아닌 적을 공격하는데 효과적이었지만, 훗날 마치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우리의 뒤통수를 가격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을 공격할 때, 같은 논리로 공격받을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근거 없는 격언에 따라 누군가를 공격할 때 자신이 방어할 상황에 대한 고려따윈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시민은 촛불을 들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했지만, 그 촛불이 태극기로 바뀌어 하나의 사건이 터질 때마다 촛불의 반대 세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과거 보수 여당의 무개념 인사를 막기 위해 청문회에서, 그리고 SNS에서 했던 말이 지금은 미래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었다. 선은 악으로 버무려지고 악은 선으로 물타기 된다. 이런 혼란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다. 내 편을 만들어 몰상식의 상식을 공유하는 것,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을 가짜뉴스를 동원해 부정하는 것...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이 터지는 조커가 악당이 되는 과정을 단순화하면 한마디로 "기대의 배신"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코미디언이 되는 게 꿈이었던 아서는 시장 출마를 앞둔 토마스 웨인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편지를 통해 자신이 고담시 최대의 갑부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현실과 갑부의 아들이라는 기대 사이의 간극이 증폭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진다. 단지 기대가 무너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서를 감당할 수 없는 밑바닥까지 끌어내린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토마스 웨인의 이야기를 듣고 병원 기록을 확인해 본 결과, 어머니는 과대망상증 환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모도 아니었으며, 자신이 앓고 있는 ‘해피한’ 정신병도 과거 어머니의 학대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 비참한 현실과 소박한 기대 속에서 살아온 아서에서 고담시 최대 갑부의 아들이라는 기대와, 자신을 정신병자로 만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던 현실 사이의 간극은 지극히 평범한 정신병자 아서를 희대의 악당 조커로 폭주하게 만든다.


영화, 조커를 보며 시종일관 궁금했던 것이 있다. 나와 같이 영화를 본 대략 400만 명의 관객은 영화 조커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악당이 되어 가는 조커에게 공감했을까?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회의 모순에 분노했을까? 나는 "기대의 배신"을 보았다. 비참한 개천 속에 거주하며 화려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 로또 당첨에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우리는 혹시, 그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 조커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글을 맺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회적 처방 하나를 날린다.  (@back2analog)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현실을 견디시라!

이전 04화 <더 헌트>, 엘리트와 포퓰리스트의 극단적 대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