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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Oct 27. 2019

일상 속에 숨어 있는 ‘당연한’ 성차별…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글에 특별한 스포는 없는 것 같습니다. ^^

옆지기, 그리고 두 딸과 함께 볼 자신이 없어서 이번에도 혼자 몰래 조조로 봤다. 남성이라는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메갈급 페미니스트로 자알 크고 있는 큰 딸이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해 준 적이 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아직까지 책은 읽지 ‘못’했다. 얼마 전에 본 ‘조커’처럼 ‘82년생 김지영’도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중간 즈음 딱 한 번 관객들의 웃음이 터져 나온 장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난 68년 생이다. 주인공 김지영은 나와 띠동갑이 살짝 넘는 14살 차이다. 김지영이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니 공유는 나와 띠동갑 즈음일 것 같다. 최근에 어쩌다 영화를 보고 조잡한 글을 몇 개 쓰기는 했지만, 난 원래 영화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다. 영화를 전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배우보다 감독을 먼저 본다던데, 난 유명한 감독이 아니면 아는 사람도 몇 안 된다. 내가 영화에 문외한임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이후 전개될 글에 대한 기대감을 낮추기 위함이다.


최근 임팩트 있게 본 영화가 ‘조커’ 뿐이라서… 굳이 ‘조커’와 ’82년생 김지영’을 비교해 보자면, 첫째, 둘 다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것? 둘째, 남성 관객이 아닌 여성 관객은 ‘82년생 김지영’을 불편이라는 감정보다는 공감이라는 감정으로 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것? 마지막으로 셋째, 영화 ‘조커’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스토리를 끄집어 내 관객들의 고개를 강제로 끄덕이게 만들었다면, ‘82년생 김지영’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관객의 고개를 자발적으로 끄덕이게 만들었다는 것? 나중엔 저절로 끄덕여지는 내 고개를 저주하고 싶을 정도로… 무심코 던진 돌멩이가 개구리를 죽일 수 있다고 했던가? ‘82년생 김지영’은 남성들이 특별히 의심하지 않았던,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 왔던 말들과 행동들이 그동안 여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어 왔는지 그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사례를 ‘충분’하게 보여주려 했다면 아마도 영화는 네버 엔딩 스토리가 되었을 것이다.

성폭력 강의를 들으며 조선시대에 태어났어야 한다고 한탄하는 직장 동료, 보채는 아이 때문에 커피를 쏟은 엄마에게 맘충이라고 비난하는 인격 장애자, 회의 중 여성 비하 발언을 개념 없이 남발하는 직장 상사, 여자 화장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ㄱㅅㄲ는 그래도 비난할 대상이라도 명확하니 사이다 축에 속하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쫓아온 남학생이 무서워 울고 있는 딸에게 옷을 단정하게 입고, 웃고 다니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그리고 아들이 좋아하는 단팥빵을 딸이 좋아하는 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아버지나, 일상의 경계를 애매하게 넘나들며 며느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시어머니나, 육아휴직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불가항력적 사회 구조는 목이 꽉꽉 매이는 고구마 에피소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 김지영이 목놓아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강한 캐릭터였다면, 그리고 남편 공유가 전형적인 ‘한남’이었다면 차라리 영화보기가 편했을까? 막장 드라마를 보듯이 맘껏 욕이라도 하며 영화를 보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기에 김지영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온순하고, 공유는 제법, 아니 꽤 훌륭한 남편이다. 특히 남편 공유의 설정은 작가가 숨겨 놓은 ‘신의 한 수’이다. 남편 공유를 통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남편들의 설 자리를 빼앗는 동시에, 그 불편한 상황의 책임을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로 일반화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을 것이다. 역시, “건축학개론”처럼 혼자 보길 잘했다. 뭔가 상황은 막장인데, 욕을 할 대상이 마땅치 않으니 속은 계속 더부룩해 오는데 트림도, 방귀도 배출이 안 되고 장에 꾸역꾸역 가스만 차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어쩌면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늘 가치의 주장과 신념의 배설을 통해 사회 구조의 책임을 인격화해 특정 개인에게 전가해 왔고, 그래야 쾌변을 본 것 같은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게 정답이 아니었던 거다. 오히려 그로 인해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더 복잡하게 꼬여 왔던 거다. 사회 문제 해결에 정답은 없다. 그러니 몇몇의 힘과 논리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많은 구성원이 참여해 진단하고 합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가부장제라는 원죄를 안고 살아가는 남성으로서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얘기하는 것 자체가 불편한 지점이 없지 않다. 여성도 아니면서 그 입장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말하자니 마치 악어의 눈물처럼 가증스럽게 보일 것이고, 나는 남성이지만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고 항변하자니 의도와 무관하게 전개된 결과의 책임에서 벗어나려 하는 겁쟁이로 보일 것 같고... 그래서 Sorry는 seems to be the hardest word지만 예전에 썼던 시(詩)덥지 않은 시 하나로 이 애매함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back2analog)


미안하다

내가 인간이라서 자연에게 미안하다
내가 남성이라서 여성에게 미안하다
내가 어른이라서 아이에게 미안하다

내가 나라서
내가 아닌 모든 이들에게 미안하다
존재 자체가 미안하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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