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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Jun 29. 2022

이상(異常)과 정상(定常) 사이…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뒷북 리뷰

얼마 전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봤다. 개봉할 때부터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과로에 시달리는 백수가 당뇨까지 걸리는 바람에 그만 놓치고 말았다. 그동안 잊고 지내다가 얼마 전 대학원 종강 후 넷플릭스부터 디즈니+, 그리고 티빙과 쿠팡플레이를 뒤적거리다 마침 티빙에 올라와 있길래 망설임 없이 선택해서 보게 되었다. (지금 보니 넷플릭스에도 있다.)

모두 비슷하겠지만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넘쳐나는 과잉생산의 시대에 가장 힘든 노동 중 하나는 바로 선택 노동이다. 작년에 출간한 졸저,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에서도 밝혔지만,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첫 번째 이유도 바로 선택 노동 때문이다.


백수가 늘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직장이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직장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만 하면 많은 것들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정해진 회의, 루틴한 업무, 심지어 극심한 정신노동을 동반하는 점심 메뉴의 선택도 그저 대세에 따르면 그만이다. 반면 백수는 모든 행동을 주체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언제 일어날지, 무엇을 먹을지, 누구를 만날지... 자신의 모든 행동에 익숙하지 않은 정신노동을 해야 하니 직장을 다닐 때보다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다(백수과시, p25).


일단 영화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라니... 수포자가 넘쳐 나는 지극히 정상한* 나라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상한 나라"도, 그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하나씩 살펴보자.


* "정상인 나라"라고 쓰는 게 맞지만, "이상한 나라"와 라임을 맞추기 위해 이렇게 썼다. 시적 허용은 아니고, 사회학적 허용?


1. 평범(平凡)에 대하여...

"이상한 나라"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평범(平凡)"에 대해 살펴보자.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정상한 나라라면, 이상한 나라는 비범(非凡)*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사실 평범이라는 단어는 살피고 자실 것도 없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단어이다. 그런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등장하는 구씨와 미정은 그 익숙하디 익숙한 평범이라는 단어를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


* 원래 "비범(非凡)"의 사전적 정의는 평범한 수준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의미지만, 나는 임의적으로 그저 평범하지 않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구씨 : 웬만하면 서울 들어가 살아, 응? 평범하게! 사람들 틈에서…
미정 : 지금도 평범해, 지겹게 평범해!
구씨 : 평범은 같은 욕망을 가질 때, 그럴 때 평범하다고 하는 거야. 추앙, 해방 같은 거 말고! 남들 다 갖는 욕망! 니네 오빠 말대로 끌어야 되는 유모차를 갖고 있는 여자들처럼!
미정 : 애는 업을 거야!

 

이쯤 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든 단어들을 의심해 보지 아니할 수 없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을 다른 사람도 과연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을까? 최근에 읽은 책(어떤 책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제보 바란다)에서 만약 사자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인간과의 대화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사자를 보면 도망쳐야 하는 인간과, 인간을 보면 잡아먹어야 하는 사자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그 의미가 같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 문명을 통해 인간의 삶이 복잡해지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도 다양하게 분화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만져본 적이 없는 사람도, 스마트폰에 중독이 되어 있는 사람도 ‘스마트폰’이라는 글자를 읽고 쓸 수는 있다. 나이 마흔 즈음 스마트폰을 처음 만져본 내 또래 세대도, 초등학교 때부터 마치 시계처럼 스마트폰을 지니고 다녔던 자식 세대도,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에 의해 길러진 조카 세대도 모두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주로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에 접속하고 있고, 어쩌면 우리가 서로 다른 평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유도 스마트폰을 통해 다른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이전에도 이미 경제 신념의 차이, 정치 이념의 대립, 그리고 빠르게 분화하고 있는 다양한 전문성으로 인해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정치와 경제와 교육이 생각하는 평범이 다르고, 그 복잡한 전문성의 영향 아래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다른 평범 속에서 살아간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를 가장 평범하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2. 정상(定常)한 나라와 이상(異常)한 나라...

먼저 문제를 하나 내 보겠다. 다음 대사를 보고 정상한 나라, 대한민국의 수학샘과,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리학성 중 누가 더 이상한지 한 번 판단해 보기 바란다.


① 정상한 나라, 대한민국의 수학샘

수학샘 : 지우야, 선생님은 지금 시험의 기술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야. 이런 거 고민할 시간에 한 문제라도 더 푸는 게 너한테 이득이겠지? 만약에 시험에 이런 문제가 나왔는데, 출제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3번을 고른다? 그럼, 틀리는 거야.
한지우 : 출제자도 틀릴 때가 있지 않나요?
수학샘 : 출제자? 너 지금 나한테...
한지우 : 틀린 문제에서 옳은 답이 나올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수학샘 : OK, 한지웅. 다음 시험에 이 문제를 토씨 하나 안 고치고 그대로 낼 테니까 넌...
한지우 : 예, 저는 3번이라고 쓸 겁니다.
수학샘 : 나가! 니들도 잘 들어, 대한민국 시험에서 수험생이 할 일은 딱 하나야.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 출제가 콩을 팥이라고 하면, 팥인 거야. 거기에 토를 달어? 그럼 니들만 바보 되는 거야.


②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리학성

북쪽에서는 나의 수학이 무기 만드는데 쓰여진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껴서 남쪽으로 내려왔더만, 여기서는 고작 좋은 대학 가고, 돈 많이 버는 직장에 가는 수단으로 수학이 쓰이더만요.


탈북 수학자 "리학성(최민식 扮)"은 리만 가설(그게 뭥미?)을 증명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지만, 자신의 신분과 사연을 숨긴 채 대한민국에서 상위 1%의 영재들이 모인 자사고의 경비원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대단한 자사고에 사회배려자로 들어와 수포자로 살아가고 있는 한지우(김동휘 扮)는 우연히 리학성을 만나 수학의 재미에 눈을 뜨게 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어렵지 느낄 것이다. 정작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 영어시험을 보고 온 고1 딸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짜증을 냈다. 시험을 망쳤냐고 물었더니 영어공부를 진짜 열심히 했는데, 문제가 너무 쉬워서 만점자가 여러 명 나올 것 같아서 짜증이 난다는 것이었다. 만점자의 수가 1등급 숫자보다 많으면 만점을 받고도 2등급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만점을 받아도 등급 걱정을 해야 하는 아이와 오로지 변별을 위해 시험 문제를 출제해야 하는 교사, 그리고 그러한 교육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정상일까?


왜 사람들은 정상이 아닌 교육을 그대로 두고, 심지어 그 비정상 안에 들어가지 못해 기를 쓰는 것일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와 <나의 해방일지>를 버무려 이해를 하자면, 모두가 1등이 되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 욕망에 동참하는 것이 평범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등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사회에선 경쟁에서 밀려나면 낙오자가 되고, 경쟁에서 물러나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3. 이상과 정상, 평범과 비범의 경계에서...

얼마 전부터 난 입장이나 신념, 그리고 전문성을 구분하거나. 나누고 있는 경계를 연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브런치의 프로필도 “경계 연구자”로 바꾸었다. 정상과 이상, 평범과 비범 중에 어떤 것이 정상이고, 어떤 것이 평범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는? 어른과 아이는? 여성과 남성은? 누구의 기준이 옳고, 누구의 기준이 틀린 것인지 확신할 수도 없다.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한 것,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옳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난 앞으로 경계 위에서 그동안 인간이 만들어 왔던 모든 신화들을 의심해 볼 생각이다. 혹자는 인간이 이룩한 빛나는 과학문명으로 인해 신화의 시대는 이미 저물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난, 지금 이 시대야말로 온갖 신화들이 과학문명을 등에 업고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신화 과잉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의 주장처럼 선택의 자유가 최고치에 다다른 인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무런 의심 없이 신화을 양산해 내고 있다. 바로 진위와 무관하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뉴스는 진짜 뉴스고, 손해를 끼치면 가짜 뉴스라고 굳게 믿는 신화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가짜 뉴스의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려운 일이 아니. 연역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답을 먼저 정해 놓고, 불확실하게 확장하고 있는 무한의 정보 속에서  가짜 뉴스의 근거가 되는 정보만 골라 제시하면 된다. 혹시 이익을 쫓는 과정에서 한쪽 눈이 멀어버린 우리는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는 정상한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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