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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Sep 25. 2019

미디어의 범람과 상식의 파괴

다음 웹툰 "미래의 시간"을 읽고...

<상식으로 미디어 읽기>를 브런치북으로 엮으며...

평소 <상식으로 미디어 읽기>라는 매거진에 한 편, 두 편 쌓아왔던 조잡한 글들 중 몇 편을 골라 브런치북으로 엮어 보았다. 드라마 볼 시간도 없는데 무슨 책이냐고 반문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책 한 권이면 대략 30편의 드라마, 영화, 웹툰을 한 방에 볼 수 있으니 속는 셈 치고 한번 읽어 보시길 권한다. 

우리는 멋진 그림을 보면 사진 같다고 말하고, 멋진 사진을 보면 그림 같다고 말한다. 또 식당 밥이 맛있으면 집밥 같다고 이야기하며, 집밥이 맛있으면 식당 밥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인형 같다고 칭송하고, 예쁜 인형을 보면 사람 같다고 감탄한다. 플라톤은 예술 창작을 위한 모방을 미메시스(mimēsis, 복제)라 불렀다. 사진이나 그림은 눈앞에 있는 인물이나 풍경을 복제한다. 식당 밥은 집밥의 복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형은 인간을 복제해 만들어진다. 일찍이 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꾼 후,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현실과 현실을 복제(mimēsis)한 다양한 미디어가 혼재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간혹 진짜 현실과 복제된 가짜 현실을 혼동하기도 한다. 

현실을 바탕으로 창작된다는 점에서 미디어는 때때로 복잡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창(窓)이 되기도 하지만, 작가의 눈에 비친 현실의 한 단면인 미디어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 현실을 은폐하거나 특정한 관점을 과장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계륵 같은 미디어를 어찌해야 할까? 모두의 시선이 6.5인치 남짓한 스마트폰을 향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는 어쩌면 현실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세대와 세대,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그리고 교육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견해가 합의로 나아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각자가 소비하는 미디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 미디어를 소비하고, 누군가는 지옥 같은 현실을 잠시라고 잊기 위해 미디어를 찾는다. 그 외에도 우리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이유로 드라마, 영화, 웹툰, 유튜브에 몰입한다.

가끔 자신은 드라마 따위는 보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지인들이 있다. 만약 100명 중 5명이 책을 읽고, 50명이 드라마를 본다면 나는 꼴랑 5명이 읽는 책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50명이나 보는 드라마를 선택할 것인가? 만약 100명 중 6번째로 책을 읽는다면 난 목에 힘을 주며 나머지 94명에게 거드름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책도 안 읽느냐며, 아도르노가 경계한 변증법이 불가능한 계몽을 시전할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행위가 나 하나의 만능감을 높이는 데는 기여하겠지만, 이 사회 구성원들의 작은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공론장이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엔 5명밖에 읽지 않는 책을 보느니, 차라리 50명이 보는 드라마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다음 웹툰 "미래의 시간"을 읽고...


솔직히 말하면 표지가 야... 해 보여서 읽기 시작했다. 나 또한 동물적 본성이 내재화된... 덜 진화된 숫컷임을 부정할 수 없다. 중후반부터 살짝 늘어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다 읽고 나니 꽤 구성이 좋은 수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스포를 하자면...
16살 때 왕따를 당해 자살을 기도한 주인공 미래(주인공 이름이 '미래'다)... 미래는 병원에서 깨어난 후, 기억하기 싫은 아픈 기억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대학 3학년(?) 때 갑자기 자신이 지워버린 과거의 미래가 등장해 현재를 살고 있는 미래의 삶을 망쳐 놓는다. 두 사람의 미래는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 존재하며 각자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는데...


난 이 웹툰을 읽으며 두 가지 생각이 교차되었다.
첫번째... 미래가 자살을 기도했던 나이와 같은 나이를 살고 있는 큰 딸에 대한 생각...
어쩌다... 제도적으로는 성년과 미성년을 구분해 놓기는 했지만 인간은 나이와 무관하게 미숙하면서 그 자체로 완성된 존재이다. 그 기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때로는 사회가 합의한 기준 안팎을 넘나들며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받아들이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수도 있고...
웹툰 속의 미래가 그랬듯...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증명한다. 나라는 존재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내가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하지만 웹툰 속에 등장하는 미래의 자아는 16세에 머물러 있는 미래와 16세 이전의 삶을 망각한 미래로 분열되어 있다. 두 사람의 미래는 처음엔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타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힘 주어 말하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현재의 미래가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의 목을 조르는가 하면, 헤어진 후 느닷없이 찾아가 키스를 하기도 한다.

혹시 전학을 요구하는 중학교 3학년 딸도 지금까지의 자신을 잊고 새로운 자아로 살아가고 싶은 것은 아닐까? <미래의 시간> 중에서

두번째... 난 ‘미래의 시간’을 읽는 도중, 미디어를 통한 상식의 분화와 그리고 상식의 분화가 만들어 내고 있는 우리 가족, 그리고 이 사회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난 필연 보다는 우연에 끌려 이 웹툰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처럼 표지에 끌려 이 웹툰을 보게 될지는 추측조차 불가능하다. 우리는 확실히 미디어 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 3개의 공중파만 있었던 시절, 우리는 그래도 미디어를 통해 상식이라는 걸 공유할 수 있었다. 그 공유가 비록 권력에 의한 통제라고 할지라도...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인터넷과 연결된 IPTV에는 백 개가 넘는 채널이 시청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한 때 평균 시청률 50.5%를 자랑하는 모래시계라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길거리가 한산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꼭 안방에 앉아, 그것도 본방만을 사수하지는 않기 때문에 정확한 시청률을 파악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통해 워낙 다양한 미디어를 소비하므로 TV의 영향력도 과거에 비해 급격히 축소되었다. 다음과 네이버, 그리고 기타 매체를 통해 연재하는 웹툰만 해도 하루에 줄잡아 100종은 될 것이다. 1일 100종 * 7일 = 700종의 서로 다른 스토리가 독자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난 그 중에서 우연하게 알게된 약 3~4종의 웹툰을 보고 있다. 고수, 유미의 세포들, 나노 리스트 등... 어디 그 뿐인가? 유투브와 아프리카 TV같은 개인 인터넷 방송까지 가세하면 미디어의 조합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바둑의 그것에 비견될 지도 모른다.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을 먼저 살펴 보자. 부모와 자식은 서로 다른 상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부모와 자식이 가지는 상식의 차이는 곧, 살아온 세월과 살아갈 세월의 차이이다. 거기에 분화된 미디어가 상식의 분화를 부추기고 있다. 부모는 자신이 살아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미디어를 섭취하고, 아이들에게 미디어는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적, 문화적 억압의 탈출구가 된다. 그리고 자본은 미디어를 앞세워 서로 다른 상식으로 갈등하고 있는 부모와 아이의 틈새를 파고 든다. 나아가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현재'라는 횡적인 시간을 형식적으로 공유하고는 있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그걸 과연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전문 영역 속에서 살고 있는 대중들은 또 각자의 취향에 따라 미디어를 소비한다. 그들이 과연 이 시대를 관통하는 상식을 공유할 수 있을까? 상식이 그러할진데 그렇다면 신념과 가치의 문제로 나아가면 또 어떨까? 내가 평소 근대주의자들을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계급사회인 중세를 무너뜨리고 탄생한 근대... 제도적 계급은 무너뜨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대에 가장 큰 갈등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소위 '계급 갈등'이었다. 그 갈등을 통찰한 것이 바로 맑스였고, 맑스는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역사발전의 5단계를 주장했다. 그 통찰은 아직까지도 매우 유의미하다. 계급을 통한 불평등은 아마 인류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므로... 하지만 본질이 계급투쟁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대하는 방법이 늘 같을 수는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근대를 벗어난 현대는 지배와 피지배,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이분법적인 당파성으로 적과 아를 구분지을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물감을 흩뿌리는 드리핑 기법으로 유명한 추상표현주의 미술가 '잭슨 폴록'은 자신의 예술 표현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현대 미술가는 낡은 르네상스 시대의 형식으로 비행기와 원자폭탄, 라디오 그리고 이 시대를 표현할 수는 없다. 모든 시대는 각기 자기 시대만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나는 '잭슨 폴록'의 말을 패러디해 현대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진보를 다시 정의하고자 한다. (@back2analog)


미디어가 상식과 신념을 분화시키고 있는 현대를 근대의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모든 시대는 각기 자기 시대만의 진보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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