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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Jan 25. 2022

사상의 자유와 인식의 자유, 그리고 진실의 종말

사상은 결국 내가 어떤 입장에 서고,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로 귀결된다. 가진 자의 입장에 설 것인지, 가지지 못한 자의 편을 들 것인지… 자본주의가 충분히 숙성된 사회에서는 아무리 그럴듯하게 치장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더 가지기 위해 입장과 편을 정한다. 가진 자는 더 갖기 위해,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자의 것을 빼앗거나 나누기 위해… 그래서 모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짓밟고, 더 가진 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경쟁한다. 모름지기 사상의 자유란 그런 동물과 다름없는 아귀다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최소한의 이성적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인식은 사상과 유사하지만 사상보다 경험과 지식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그래서 더 잘게 쪼개진다. 같은 입장, 같은 편이라고 하더라도 경험과 지식에 따라 인식의 차이가 발생한다. 가족은 일반적으로 같은 입장, 같은 편인 경우가 많지만, 인식의 차이로 갈등한다. 민주당 지지자가 친문과 반문으로 갈라지거나, 진중권이 정의당을 들락거리는 것은 모두 사상이 아닌 인식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이다.


사상이 집단이 해결해야 할 영역이라면 인식은 철저히 개인이 넘어야 할 영역이다. 일반적으로 물리학자들은 인류가 전체 우주의 대략 4%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4%는 겸손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매우 오만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인식하고 있는 우주가 코끼리의 뒷다리 일지, 꼬리 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4%는 100%를 가정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수치이다. 우주는 코끼리가 아니다. 장님이 코끼리의 코를 만지면서 “이게 코끼리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략 4%는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편으론 자신들도 겨우 이해하고 있는 것을 물리학자들만이라고 선을 긋지 않고 ‘인류’라는 말로 하찮은 나까지 포함시켜 준 것은 고맙기도 하다. 사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이 시대 가장 똑똑한 물리학자가 그렇다는 것이고, 나 같은 무지렁이는 우주의 0.0000000…4%도 모르면서 잘난 체를 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인식의 자유는 내가 인식하는 것이 실체의 4%도 안 된다고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최근 20대의 보수화(보수화라는 용어의 정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의 부재로 인해 사상은 갈수록 하찮아지고, 인식의 차이가  중요하게 부상한 결과라고   있다. 사상으로 치면 보수화가 맞을지도 모르지만 인식의 관점으로 본다면 진보와 보수로  현상을 구분하는 것은 허공에 대고 노를 젓는 것처럼 의미가 없다. 바야흐로 사상과 인식이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나면 진실은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것이다. 우리가 원시 인류에게 느끼듯, 지금의 인류 또한 미래 인류의 눈에는 코끼리를 더듬거리는 장님으로 보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상과 인식의 자유는 미래 인류의 눈에 우리가 어떻게 보일 지를 염두에 두고 진실의 실체에 대한 가치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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