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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May 05. 2022

교육자치와 학교자치, 그리고 마을교육공동체

※ 본 원고는 공주대학교 "교육정책론" 수업에서 교수님으로부터 논리가 없고 장황하다는 혹평을 받은 발표문입니다. ㅠㅠ


1. 序 : 교육에 대한 내부서술과 외부서술


심리학에 경제학을 접목한 “행동경제학”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인간은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믿지만 결코 그렇지 않으며, 그 까닭은 인간이 빠른 직관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을 어리석게 만드는 생각의 작동방식을 들여다보는 것이며, 우리 모두 멍청이임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의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다(구본준, 2012). 이는 비단 경제 분야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교육을 중심으로 파생되는 대부분의 사회 문제 또한 교육이 매우 이상적이고, 합리적일 것이라는 기대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곤란에 빠지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 마크 트웨인 - 


모든 것은 상호작용을 통해 진화 발전한다. 연체동물로부터 진화해 온 다양한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골격을 세워야 했다. 외부에 골격을 세운 갑각류는 진화 대신 안전을 택했다. 반면 포유류는 생체기관을 겉으로 드러내고 내부에 골격을 세웠다. 결국 가장 창조적인 진화를 한 것은 보호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종이었다(알베르 자카르, 1999: 201-202). 교육 또한 끊임없이 변해 왔고, 여전히 끊임없는 변화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은 상호작용이 아닌 지식을 전달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 수준의 일방향적 특성으로 인해 그 변화가 진화에 이르지 못한 채 벼랑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교육체계의 자기서술, 즉 교육의 성찰이론인 교육학에게 교육은 ‘모든’ 것이다. 교육은 오로지 교육의 관점에서, 경제는 오로지 시장의 관점, 정치는 오로지 정치의 관점에서 다른 체계들을 살핀다. 예컨대 정치 체계가 ‘민주시민의 소양을 충분히 양성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거나, 경제 체계가 ‘기업의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졸업생을 양산했다.’고 비난할 때 교육의 반응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교육체계는 각 체계가 나름의 필요와 수요에 따라 다른 체계의 성과, 이 경우 교육적 성과를 수용하는 특성을 인정하기보다, 비교육적 기준으로 교육을 재단하는 시도들이라 비난한다(전상진·김무경, 2010: 242-243).


교육자치와 학교자치가 교육 체계의 내부서술을 강화해 온 전통적인 논리에 바탕을 둔 정책이라고 한다면, 최근 혁신교육지구를 통해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마을교육공동체는 오랫동안 학교를 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의 용을 키워내기 위해 개천에 머물러 왔던 마을이 마침내 교육에 대한 외부서술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本 : 교육자치, 학교자치, 그리고 마을교육공동체


1) 등장 배경과 논란


① 교육자치

1991년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 제정을 계기로 형식적으로 운영되던 지방교육자치가 사실상 ‘부활’했지만, 주민이 교육자치를 체감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07년 시작된 교육감 주민 직선 이후에 상황이 크게 변했다. 교육부장관과 교육감이 소송을 불사할 만큼 갈등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중앙정부와 시·도교육청 간의 정책 경쟁이 시작됐다. 무상급식이나 혁신학교, 학생인권조례 등은 지방교육자치의 소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로서, 한국의 학교교육 정책 발전 과정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의제들이었다. 또, 지역 간에도 선의의 경쟁과 협력이 나타났다. 좋은 정책이 여러 지역으로 전파돼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시·도교육청 간의 연계와 협력도 점차 심화하고 있다(김용, 2021).


교육감 직선제 이전, 교육자치의 실현이 단지 요구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1990년대 국내 학술지에 소개된 교육자치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보면, 송병주는 교육자치란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및 정치적 중립성을 교육행정 면에서 보장하기 위한 제도(송병주, 1992: 16)”이므로 “첫째, 교육행정의 자주성과 정치적 중립성, 둘째, 교육행정의 특수성, 셋째, 교육행정의 전문적인 관리의 요청으로 인해 교육행정이 일반행정으로부터 분리, 독립되어야 한다(송병주, 1992: 16-17 요약)”고 주장한다. 반면 김태완은 “교육운영에서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이란 허구적인 개념(김태완, 1991: 22)”이라고 비판하며 교육행정이 “지금과 같이 일반행정으로부터 분리·독립되어 명목상으로만 일반행정과 대등한 위상을 갖는 체제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지방자치단체장이 교육을 자치단체의 가장 중요한 업무로 인식하고 교육운영의 최종적인 권한과 책임을 지는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김태완, 1991: 27).”고 주장한다. 


교육자치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지방분권과 만나면서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는 마을교육공동체를 바라보는 다양한 주체*들의 동상이몽 탓이다. 학교 입장에서는 마을교육공동체를 마을이 학교를 지원해 공교육을 정상화시키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반면, 마을에서는 마을을 향해 굳게 닫혀 있는 교문을 개방하는 것이 마을교육공동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육자치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른 이견은 교육감을 시민이 선거로 선출하고 있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교육 거버넌스 갈등의 핵심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시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교육감을 선출하는 교육자치는 교육자치가 교육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인정하고, 확대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교육 전문가들에게만 교육감 선출 권한이 주어진다면 모를까, 시민이 직접 교육감을 선출하는 교육자치는 오히려 교육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시민의 상식에 맞게 해체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반자치는 오랫동안 시민의 요구와 무관하게 작동되어 온 일반행정의 전문성이 시민의 상식에 맞게 작동할 수 있도록 일반행정의 인사권과 예산편성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의 대표를 투표로 선출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자치는 시민이 직접 투표를 통해 선출한 교육감이 시민의 상식과 어긋나고 있는 교육행정의 방향을 바로잡는 것이다. 즉, 교육감은 교육의 전문성을 대표하는 자리가 아니라 시민이 가지고 있는 교육의 상식을 대변하는 자리로 보아야 한다. 


동시에 몇 년 전부터 다른 한쪽에서는 교육감 직선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연기를 모락모락 피우고 있다.*** 양보와 타협을 통한 합의보다는 비타협적 투쟁을 통해 성장해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신념과 가치를 기준으로 진영을 먼저 나누는 것에 익숙하다. 유일한 대화가 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다. 그 시대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를 반지성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고 있다(손호철, 2019).


* 주체라는 단어보다는 “stakeholder”, 이해당사자가 더 적합한 표현이다. 아래 글 “주체인가 이해당사자인가?” 참조


*교육자치 관련 세력의 지방분권형 개헌 참여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교육자치가 왜 중요한지, 중요하다면 교육자치를 위해 필요한 일은 무엇인지, 그 필요한 일을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를 아직 형성하지 못했다. 교육자치란 당연히 교육에 대한 권한을 지방정부가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하다. 교육자치를 튼튼하게 할 분권적 제도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교육자치는 미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민원, 2017/2/19).


**김봉구(2018). “교육감 직선제 폐지하자… 정치인 아닌 교육자 필요”. 『한국경제신문』 (2/28)


② 학교자치

교육감 직선제를 통해 일정 정도 제도적으로 보장된 교육자치와는 달리 학교자치는 해결되지 않은 제도적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오랫동안 중앙집권적 교육행정에 길든 학교는 학교 구성원 간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 결정하고 추진하기보다는 상급 행정관청의 지시에 소극적으로 순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태도와 관행을 일신해 학교 구성원들이 숙의해 어떤 일을 결정하고, 공동의 책임으로 그 일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학교자치 정책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학교자치는 정치 또는 일반 행정 권력에 학교교육이 예속됐던 경험을 성찰하면서 학교 운영을 바꿔보고자 한 것이다. “모든 학교는 국가의 시설물이며 국가의 지도 감독을 받는다”는 법 조문이 등장한 것은 1794년 프로시아 헌법에서였다. 이 조문은 국가의 학교 감독권을 규정한 것으로서 세계 여러 국가의 교육법에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현행 교육기본법에도 유사한 내용의 조문이 있다. 이 조문은 국가의 교육 책임을 명시한 점에 의의가 있지만, 이 조문에 근거해 정치 권력이 학교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일이 나타나기도 했다. 독일의 나치 정권은 학교를 전쟁에 이용해 많은 독일인이 전쟁 범죄에 자발적으로 가담하게 만들었다. 일본에서도 천황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교육받은 청소년들이 비행기를 몰고 자폭을 감행하기도 했다(김용, 2021).


학교자치는 1980년대 말 이후 세계 여러 국가에서 교육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학교 자율 운영(schoolbased management)이나 학교 단위 변화(site-based school change) 정책으로 추진됐다. 우리나라에서도 1995년 교육개혁을 추진하면서 각 학교에 학교운영위원회(이하 학운위)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면서 학교 자율 운영 정책이 시작됐다(김용, 2021). 하지만 학운위 수준으로 진정한 학교자치를 실현하는 데는 적지 않은 한계가 있었다. 이에 2002년 제16대 대선 당시 교원단체들을 중심으로 단위학교의 심의기구로서 학운위를 중심에 두고, 그 밑에 학생회, 교사회 등 교육당사자들의 조직을 제도화함으로써, 이들의 학교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학교자치 법제화 요구가 시작되었고, 2012년 대선 때 특정 후보자가 학교자치를 공약으로 채택하면서 교육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법제화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학운위를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그쳤다(홍석노, 2019: 96). 


학교자치에 관한 법제화는 2013년 유은혜 의원 외 22인이 “초∙중등교육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통해 시도했으나 결국 좌초되었다. 그리고 학교자치에 관한 법제화는 중앙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로 넘어갔다. 광주광역시는 2012년 “광주광역시 학교자치에 관한 조례안”을 발의했으나, 2013년 당시 교육과학기술부의 재의결 요청에 따라 대법원은 2016년 조례안 재의결 무효확인 판결을 내렸다. 2016년 경기도의 박승희 위원은 또다시 “경기도 학교자치 조례안” 제정을 시도했지만, 상임위 임기만료로 자동 폐기되었고, 천영미 의원이 2019년 기존의 조례안을 전면 개편해 제정하였다.** 학교자치에 관한 조례는 여전히 위법성 논란***의 중심에 있으나 다만 과거에 비해 입법을 위한 정치적 환경과 여건이 좀 더 우호적으로 바뀌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홍석노, 2019: 97).


1998년 제정된 초∙중등 교육법 제31조 1항


** 학교자치와 관련한 법제화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지방자치단체 중에서도 광주, 경기(2019), 강원(2021), 부산(2022)만이 조례가 제정되어 있다.


**위법성 논란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감히 조례 따위가 법률이 정한 교육감과 학교장의 권한을 제한했다는 “법률우위 원칙 위반”과  법령의 위임 없이 교육감과 학교장의 권한을 제한했다는 법률유보 원칙 위반이다. 갑자기 노무현 대통령의 행정수도 이전을 반대했던 “관습헌법” 논란이 떠오른다. 자치분권이 가능하려면 조례의 권한이 헌법의 가치에 위배되지 않는 한 법령과 동등하거나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③ 마을교육공동체

마을교육공동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선 가깝게는 2011년 경기도에서 시작했던 “혁신교육지구”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대안학교 운동”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안교육의 대부로 불리는 송순재는 “해방 후 근대 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중요성이 설파되고, 정치적인 분기점마다 교육개혁 정책들이 시행되면서 많은 성과를 보았다고 하지만, 한편 그 성과라는 것은 늘 새로운 위기를 담보로 한 것이었으며, 상황은 날로 악화되었다. 성공이라면 교육의 국가의 발전, 특히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고,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의 민주화를 기하여 중등교육 이상, 특히 고등교육 인구를 증대시켰고, 따라서 지적인 엘리트 집단 폭이 넓어졌고, 국민 대중은 지적으로 좀 더 높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등등의 것인 반면, 위기라면 국가발전 이데올로기 아래 개인을 전체주의적 틀에 복속시켰고, 지식교육만을 추구하여 인간과 삶 그리고 개성을 억제하고 평균화시켰으며, 맹목적 학력주의를 부추겨 얼빠진 교육 지상주의만을 확산시켰으며, 경쟁적 인간만을 양산해 결국 우리가 사회가 미래에 대한 설득력 있는 전망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송순재, 2006: 158).”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대안교육운동의 유형을 “국가가 주도하는 제도권 공교육 틀을 비판적으로 넘어서려는데 초점을 맞춘 형태와 우리나라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교육 문제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데 초점을 맞춘 형태”의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해석했다(송순재, 2006: 152-163). 이러한 대안학교 운동은 오랫동안 (공)교육에서 배제되어 왔던 마을이 교육의 본격적인 주체로 등장하는 마을교육공동체로 이어지게 되었다. 


반면 경기도교육청에서 시작해 빠르게 확산해 온 혁신교육지구는 공교육의 위기감에서 시작된 측면이 없지 않다. 경기도교육청은 2011년 혁신교육지구를 시작하며 그 개념을 “경기도교육청과 경기도 내 기초 지자체가 협약을 통해 경기혁신교육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모두에게 신뢰받는 공교육 혁신을 이루기 위하여 교육감과 지자체장이 지정한 시·군 또는 시군의 일부 지역(구역)”이라고 정의했다(경기도교육청, 2014: 2). 즉 혁신교육지구의 주체는 학교에서 마을로 확대되었지만, 목표는 여전히 학교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공교육 혁신”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 경기도교육청이 혁신교육지구를 시작하게 된 속내는 혁신학교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지자체의 재정적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양병찬, 2018: 7). 


경기도에 이어 2015년에 서울형이라는 이름을 달고 혁신교육지구를 시작한 서울시교육청 또한 경기 혁신교육지구를 참조해 서울형혁신교육지구의 개념을 “모두에게 신뢰받는 공교육 혁신을 이루기 위해 교육청, 서울시, 자치구, 지역주민이 협력하여 혁신교육정책을 추진하도록 서울시와 교육청이 지정하여 지원하는 자치구”라고 정의했다(채희태, 2018: 21). 하지만 교육행정은 일반행정과 함께 혁신교육지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목표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교육청은 “2017 서울형혁신교육지구 주요 운영 방침 연구”를 통해 서울형혁신교육지구의 개념을 “참여와 협력으로 아동청소년이 행복한 마을공동체”로 수정했다(김세희 외, 2016: 79). 하지만 연구의 제안이 기본 운영 계획에 반영되는 과정에서 ‘마을공동체’가 ‘마을교육공동체’로, 그것도 부족했는지 앞에 ‘학교’가 추가되어 “참여와 협력으로 아동청소년이 행복한 학교-마을교육공동체”로 확정했다. 마을공동체 안에는 이미 교육적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마을공동체가 지나치게 포괄적인 개념이어서 교육의 기능을 강조하고 싶다면 ‘마을교육공동체’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학교-마을교육공동체’로 학교와 마을교육공동체를 분리해 명기한 것은 여전히 교육이 마을을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현재 권인숙, 안민석 의원 등이 “마을교육공동체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고, 교육부에서도 마을교육공동체 지원을 위해 “학교와 마을의 연계∙협력 촉진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교육공동체 법안이 새 정부에서 과거 학교자치 관련 법안이나 조례처럼 케케묵은 헌법의 기준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 현재 전국 227개 기초 자치단체 중 190개(84%)의 자치단체가 다양한 이름으로 혁신교육지구를 추진하고 있으며, 마을교육공동체 조례를 제정한 광역 지방자치단체는 경기, 인천 등 14개에 이른다.



2)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


① 교육의 자주성?

모든 개념은 정의와 인식 사이의 괴리가 존재한다. “거버넌스”만 하더라도 행정학, 정치학, 사회학 관점에서의 인식이 모두 제각각이다. 행정학은 일반적으로 행정의 효율성 측면에서 거버넌스를 살핀다. 정치학은 - 당연하게도 - 거버넌스를 통치의 원리로 인식한다. 그래서 보다 명징한 “협치”라는 단어를 선호한다(채희태, 2020: 13). 공공 사회학(public sociology) 관점의 거버넌스는 전문 사회학(professional sociology)인 행정학이나 정치학에 비해 패러다임이 넓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개념 정의 또한 모호하다. 발표자는 2018년 “교육 거버넌스를 둘러싼 갈등 사례 연구”에서 거버넌스라는 개념의 모호함을 “특정한 주제와 관련하여, 이해관계를 가진 민·관의 다양한 주체들이 모여, 수평적으로 협력하는 문제 해결 방식’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채희태, 2018: 43).


거버넌스보다 훨씬 더 친숙한 개념인 “자주성”은 그 친숙함으로 인해 오히려 자의적 해석이 난무한다. 이른바 친숙함이 주는 함정이요, 쉬운 한글이 제공해 온 오래된 역설의 하나다. 한글로 쓰인 개념을 쉽게 읽어냄으로써 그 복잡 미묘한 개념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 그 착각은 이내 확신으로 이어진다. 그 확신이 교육과 만나면 바야흐로 거역할 수 없는 종교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4항에 명기된 소위 “교육의 자주성”이 그러하다. 자주성이라는 개념을 확인하기 위해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립국어원에서 발행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자주성”이라는 단어가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네이버와 다음 사전을 찾아보았다. 네이버와 다음 사전에서는 자주성을 공히 다음과 같이 정의해 놓았다.


스스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성질


그렇다면 교육의 자주성이란 교육이 사람의 개입 없이도 스스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까?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인간이 인격화된 자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아마 헌법이 교육에게 자주성과 더불어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 그리고 대학에만 국한된 자율성을 부여한 것은 특별한 역사적 맥락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현재의 시대적 맥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당당하게 문제를 제기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의 자주성이 애초의 취지와 무관한 의도로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교육의 자의적 해석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함께 질문을 통해 “거버넌스적”으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해 낼 필요가 있다. 비인격체인 교육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속 자주성을 부여할 것인지, 아니면 마을교육공동체를 위해 오랫동안 지켜온 교육의 자주성을 내려놓을 것인지…


② 주체인가, 이해당사자인가?

교육과 관련해서 자주성이라는 단어보다 더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주체이다. 주체라는 단어는 비단 교육뿐만 아니라 모든 거버넌스 영역에서 맹활약 중이다. 주체(主體)를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몸의 주인이다.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몸은 오로지 자신의 몸밖에 없다. 요즘은 내 몸에서 나온 자식한테도 ‘일’해라, ‘절’해라 할 수 없는 시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누구나 대한민국의 주인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대한민국을 소유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함께 어떤 일을 도모할 때 주체라는 말에 그 어떠한 기대도, 집착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주체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주체라는 말은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회 속에서 내 몸 하나 어쩌지 못하게 되자 생겨난 모종의 욕망 같은 것은 아닐까?


“이해당사자”라는 개념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주체에 비하면 매우 낯선 단어다. 그래서 다소 장황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10명이 힘을 합해 소를 한 마리 잡았다면, 그 소를 분배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일까? 소를 잡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 소를 잡기 전에 합의에 의해 분배의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 10명 중 소를 잡는 데는 참여했지만, 소의 분배 방식이나 권한에 대해서는 합의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주체는 모두일 수도 있고, 모두가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소를 분배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주체이지만,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소의 분배를 결정할 수 없으니 그 누구도 주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이 폭력이든 합의든 소의 분배 방식이 결정될 때까지 10명은 모두 소(stake)를 잡(hold)고 있는 사람(er), 즉 이해당사자(stakeholder)로 존재한다. 소를 교육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자. 교육의 주체는 누구일까? 그것이 신념이든, 지식이든, 아니면 돈이든 우리는 모두 교육의 이해당사성을 가지고 교육 거버넌스에 참여한다. 공과 사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공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에게 대중들이 고민 없이 동의한 결과이다. 우리는 판사에게 독립된 헌법 기관이라는 공적 권한을 위임했지만, 판사 또한 자신의 사적 감정을 완벽하게 배제할 수 없는 인간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교육의 주체인 동시에 이해당사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비로소 교육을 보다 공정하게 작동시킬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학생, 교사, 학부모를 교육의 3주체라고 이야기한다. 학생은, 교사는, 그리고 학부모는 진정한 교육의 주체일까? 주체로서 교육에 대한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을까? 학생이든, 교사든, 학부모든, 그리고 마을교육공동체의 새로운 주체로 떠오르고 있는 지역사회든 그저 이해의 당사자일 뿐이라는 주체 파악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


③ 마을이 아닌 신념의 공동체

수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 집합의 정의는 “특정 조건에 맞는 원소들의 모임”이다. 집합이 되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하다. 마을공동체도 하나의 집합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을공동체라는 집합을 이루는 조건은 ‘마을’이라는 지리적 조건일까, 아니면 지리적 조건을 공유하면서도 생각이 같거나 비슷해야 한다는 ‘신념의 조건’일까? 소위 마을공동체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말하는 마을공동체가 ‘마을’보다는 ‘신념’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정치권이든, 행정가든 소위 우리나라의 네임드 중 최초로 마을공동체의 중요성을 제기한 사람은 바로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박시장이 마을공동체를 앞세워 천하를 도모하려는 웅대한 뜻을 품은 유비라면, 박시장으로 인해 물을 만난 시민사회는 모두 관우고, 장비고, 조자룡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빠른 경제 성장 속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마을공동체가 파괴되어 온 나라이고, 그 나라에서 채 시민이 되지 못한 국민들은 공동체가 주는 구질구질함보다 분리와 소비가 주는 안락함과 달콤함에 빠져 인간이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 또한 빠르게 망각해 왔다. 박시장으로 인해 간디가 무려 1세기 전에 부르짖었던 마을공동체 바람이 뒤늦게 대한민국에서도 불기 시작했다. 그만큼 마을과 공동체라는 것이 인간사회에서 기본적인 가치이기 때문이거나, 대한민국이 경제에 몰빵하며 걸어왔던 특수성으로 인해 공동체의 파괴가 절박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역시 대한민국 답게 마을공동체가 반공동체적인 전문성으로 평화롭게 찢어발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마을공동체를 둘러싼 진영의 분화가 그것이다. 애초부터 마을공동체가 빅텐트가 아닌 플랫폼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마을공동체를 표방한 유사 브랜드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마을교육공동체”가 그중 하나요, 복지와 의료가 만나 영어 간판으로 내 건 “커뮤니티 케어”가 또 다른 하나다. 


마을공동체이든, 마을교육공동체이든 그 의미 자체에는 동의하나 '교육'이라는 단어 하나 있고 없고가 현실에서는 매우 큰 구분이 된다. 좋은 의미가 진영이 만든 신념의 구분으로 훼손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마지막으로 마을교육공동체를 가로막는 세 가지 저항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한다. 

첫 번째 제도적 저항은 일반자치와 교육자치 간의 충돌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제도적으로 일반자치와 교육자치가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그 제도적 구분의 결과가 매우 자의적이며 미묘하면서도 복잡하다. 마을교육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이 제도적 저항을 어떻게 돌파할지가 관건이다. 이미 교육의 전문성이 시민이 지향하는 상식의 방향과 한참 어긋나 있는 것도 문제지만, 나아가 우리 사회에선 전문성이 밥그릇의 크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단순히 제도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두 번째 문화적 저항은 성장과 선발의 충돌이다. 성장과 선발의 균형은 마치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자유와 평등의 균형만큼 어려운 과제이다. 성장이 교육의 모든 것이었던 중세 이전과 다르게 산업자본주의에서는 선발의 필요성이 교육의 성장 기능을 압도해 왔다. 교육은 중세의 계급제도를 해체하는 혁명적 도구였지만, 현재에는 역설적으로 실력의 차이에 따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억압의 망치가 되고 있다. 이러한 역설은 비단 교육뿐만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근대와 탈근대가 충돌하는 시대적 저항이다. 공동체가 작동하려면 그 구성원의 쓸모를 인정해야 한다. 그 쓸모를 권력으로 억압해서도 안되고 신념으로 구분해서도 안 된다. 마을교육공동체가 이러한 근대성과 선을 그을 수 있다면, 그것이 마을공동체면 어떻고, 마을교육공동체면 또 어떻고, 커뮤니티케어가 된들 어떻겠는가!


3. 結: 방법으로서의 경계


국가 정책의 실패로 등장한 거버넌스는 방법으로서 경계를 선택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거버넌스는 국가 정책이 실패했으므로 다시 부도덕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정책의 권한을 이양하자는 것이 아니다. 초기 자본주의 시절, 시장의 실패는 이미 경험했다. 자본주의가 직면한 불확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시장이 가지고 있는 역동성과 국가정책이 가지고 있는 안정성이 모두 필요하다. 시장의 전문성과 국가의 전문성을 특정한 입장이 아닌 경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에 비유한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피레네 산맥 이 편에서의 진리가 저 편에서는 오류가 될 수 있다며, 산맥이라는 경계 위에서 진리와 오류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살폈다(파스칼, 2003: 101/831). 한의학은 인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지만, 서양의학은 몸을 나누어서 본다. 동양의 세계관은 얽힘과 연결이고, 서양의 세계관은 분리와 맞섬이다. 이철은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을 통합하여 맞선 둘은 하나라는 ‘맞얽힘’의 세계관을 주장한다(이철, 2021: 316-318).


인류의 역사 속에서 경계의 기준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우연에서 필연으로 이동했다고 해서 과거의 기준이 쓸모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권력은 과거에 기준에 익숙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과거의 기준에 익숙한 개인이 존재하고 있는 한 그 기준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의 왼쪽과 오른쪽이 투쟁을 통해 헤게모니를 잡아야 한다는 근대의 역사 발전 법칙이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충분하다.  좌와 우의 경계는 세계를 폐허로 만든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을 비켜간 6∙8 혁명을 거치면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근대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념의 경계가 힘을 잃자 더 많은 경계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새로운 경계가 근대를 양분했던 이전의 경계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경계의 하위 개념쯤으로 인식하거나, 둘 중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경계가 감당할 수 없이 범람하고 있다면 그 경계가 나누고 있는 어떤 입장을 선택하는 대신 경계 자체를 제3의 방법으로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선택한 그 입장이 무수히 많아진 경계로 인해 세상의 절반이 아닌 무한대에 수렴하는 분모 n분의 1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육자치와 학교자치, 그리고 마을교육공동체 또한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체계들을 살피기보다 그 경계 위에서 교육과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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