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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Jun 17. 2022

에믹과 에틱의 관점으로 바라본 마을교육공동체

1. 에믹과 에틱에 대하여


3차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입체적 형태로 존재하며, 인간은 두 개의 눈을 통해 3차원 공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을 입체로 인지한다. 이는 인간이 두 개의 귀로 소리의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귀가 두 개인 덕분에 인간은 눈을 감고도 비행기가 어느 쪽에서 출발해 어느 쪽으로 날아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입체적으로 인지한 사물은 안타깝게도 인간의 의식 세계를 통과하고 나면 하나의 점이 된다. 그것이 바로 관점이다. 1차원 세상에서의 관점은 평등할 수 있으나 2차원부터는 관점과 관점 사이에 상호작용이 시작되며 그로 인해 의도와는 무관한 위계가 형성된다. 더구나 우리는 3차원에 시간까지 결합한 4차원 세상에 살고 있다. 독일의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은 『지나간 미래』에서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의 관계를 통해 시간을 중심으로 근대성을 성찰하기도 했다(황정아, 2014: 127). 경험은 지나간 과거, 기대는 다가올 미래를 의미한다. 시대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현재라는 시간은 변하지 않는 과거와, 갈수록 예측이 불가능해지고 있는 미래의 전쟁터가 되어 가고 있다.


관점은 특정 대상이 형성한 경계의 벽에 맺힌 상이라고 할 수 있다. 관점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예는 바로 장님과 코끼리의 우화이다. 눈으로 코끼리를 볼 수 없는 장님은 손을 더듬어 코끼리를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장님은 각자가 손으로 만진 부분을 코끼리의 전부라고 인식한다. 장님을 비웃을 일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하고 있는 오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는 이성을 이성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상상과 결합시켜 무수히 많은 사회 체계들을 양산해 왔고, 그렇게 형성된 사회 체계와 인간의 관계가 코끼리와 장님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관념론의 반대편에 있던 유물론에 과학을 장착해 근대 자본주의를 진단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마르크스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관념의 영역에 계급이라고 하는 굳건한 경계를 세웠을 뿐이다. 인간이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만든 경계이자 질서인 정치, 문화, 교육 등과 그 하부를 단단하게 떠받치고 있는 계급이라고 하는 경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관점의 대상을 교육으로 좁혀보자. 코끼리와는 다르게 이성을 가진 인간이 만든 사회 체계들은 모두 경계의 밖과 더불어 확실한 안쪽 면을 가지고 있다. 코끼리가 자신의 몸을 더듬는 장님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사회 체계, 그 중에서도 교육이 경계 밖의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는 일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교육이라는 하는 관념 체계를 눈에 보이는 3차원의 세상에 구축한 것이 바로 학교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교육이 자신의 경계 밖으로 보내는 관점들을 마주한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교육의 관점을 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는 그저 물리적인 경계일 뿐, 교육이라는 경계가 학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체계이론을 확립한 루만(Niklas Luhmann)은 경계 안쪽의 관점을 “자기서술(Selbstbeschreibung), 경계 바깥쪽의 관점을 외부서술(Fremdbeschreibung)이라고 표현했고, 키저링(Kieserling Andre)은 “내부적 관점(internal point of view)”과 “외부적 관점(external point of view)”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러한 두 가지 서술 방식을 근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기능 분화의 결과(전상진/김무경, 2010: 242에서 재인용)라고 보았다. 또한 전상진은 자기서술의 중요한 쓰임새는 기능 체계의 정당화에 있다고 지적했다(전상진/김무경, 2010: 242).


복잡한 사회 체계를 인지함에 있어 코끼리 앞의 장님이 되지 않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이 굳게 믿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내부서술과 외부서술을 쏟아내고 있는 특정한 입장을 선택하기보다 경계의 안팎을 균형감 있게 살피는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루만이 이야기한 내부서술과 외부서술의 관점을 인류학에서 출발해 다양한 연구방법론에 적용되고 있는 에믹(EMIC, 주체의 관점)과 에틱(etic, 관찰자의 관점)의 관점으로 치환해 최근 교육계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마을교육공동체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마을교육공동체


마을교육공동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선 가깝게는 2011년 경기도에서 시작했던 “혁신교육지구”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대안학교 운동”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안교육의 대부로 불리는 송순재는 해방 후 근대 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중요성이 설파되고, 정치적인 분기점마다 교육개혁 정책들이 시행되면서 많은 성과를 보았다고 하지만, 한편 그 성과라는 것은 늘 새로운 위기를 담보로 한 것이었으며, 상황은 날로 악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성공이라면 교육의 국가의 발전, 특히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고,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의 민주화를 기하여 중등교육 이상, 특히 고등교육 인구를 증대시켰고, 따라서 지적인 엘리트 집단 폭이 넓어졌고, 국민 대중은 지적으로 좀더 높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등등의 것인 반면, 위기라면 국가발전 이데올로기 아래 개인을 전체주의적 틀에 복속시켰고, 지식교육만을 추구하여 인간과 삶 그리고 개성을 억제하고 평균화시켰으며, 맹목적 학력주의를 부추겨 얼빠진 교육지상주의만을 확산시켰으며, 경쟁적 인간만을 양산해 결국 우리가 사회가 미래에 대한 설득력 있는 전망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송순재, 2006: 158). 나아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대안교육운동의 유형을 “국가가 주도하는 제도권 공교육 틀을 비판적으로 넘어서려는데 초점을 맞춘 형태와 우리나라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교육 문제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데 초점을 맞춘 형태”의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해석했다(송순재, 2006: 152-163). 이러한 대안학교 운동은 오랫동안 (공)교육에서 배제되어 왔던 마을이 교육의 본격적인 주체로 등장하는 마을교육공통체로 이어지게 되었다.


반면 경기도교육청에서 시작해 빠르게 확산해 온 혁신교육지구는 공교육의 위기감에서 시작된 측면이 없지 않다. 경기도교육청은 2011년 혁신교육지구를 시작하며 그 개념을 “경기도교육청과 경기도내 기초 지자체가 협약을 통해 경기혁신교육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모두에게 신뢰받는 공교육 혁신을 이루기 위하여 교육감과 지자체장이 지정한 시·군 또는 시군의 일부 지역(구역)”이라고 정의했다(경기도교육청, 2014: 2). 즉 혁신교육지구의 주체는 학교에서 마을로 확대 되었지만, 목표는 여전히 학교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공교육 혁신”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 경기도교육청이 혁신교육지구를 시작하게 된 속내는 혁신학교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지자체의 재정적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양병찬, 2018: 7).


경기도에 이어 2015년에 서울형이라는 이름을 달고 혁신교육지구를 시작한 서울시교육청 또한 경기 혁신교육지구를 참조해 서울형혁신교육지구의 개념을 “모두에게 신뢰받는 공교육 혁신을 이루기 위해 교육청, 서울시, 자치구, 지역주민이 협력하여 혁신교육정책을 추진하도록 서울시와 교육청이 지정하여 지원하는 자치구”라고 정의했다(채희태, 2018: 21). 하지만 교육행정은 일반행정과 함께 혁신교육지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목표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교육청은 “2017 서울형혁신교육지구 주요 운영 방침 연구”를 통해 서울형혁신교육지구의 개념을 “참여와 협력으로 아동청소년이 행복한 마을공동체”로 수정했다(김세희 외, 2016: 79). 하지만 연구의 제안이 기본 운영 계획에 반영되는 과정에서 ‘마을공동체’가 ‘마을교육공동체’로, 그것도 부족했는지 앞에 ‘학교’가 추가되어 “참여와 협력으로 아동청소년이 행복한 학교-마을교육공동체”로 확정했다. 마을공동체 안에는 이미 교육적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마을공동체가 지나치게 포괄적인 개념이어서 교육의 기능을 강조하고 싶다면 ‘마을교육공동체’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학교-마을교육공동체’로 학교와 마을교육공동체를 분리해 명기한 것은 여전히 교육이 마을을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현재 권인숙, 안민석 의원 등이 “마을교육공동체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고, 교육부에서도 마을교육공동체 지원을 위해 “학교와 마을의 연계∙협력 촉진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교육공동체 법안이 새정부에서 과거 학교자치 관련 법안이나 조례처럼 케케묵은 헌법의 기준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3. 도구화되는 공동체


마치 모든 것을 압도하는 선이자 진리인 것처럼 포장되어 최근 대한민국에 떠돌고 있는 공동체는 시대에 따라, 또한 지역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아왔다. 낭시(Jean-Luc Nancy)는 블랑쇼(Maurice Blanchot)와 함께 쓴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에서 우리로부터 떠나버렸지만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고 거북하게 만드는 ‘공동체’라는 물음을 우리가 계속 붙잡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공동체’라는 말과 그 개념은 나치의 Volksgemeinschaft(민중의 공동체)라는 덫을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장-뤽 낭시, 2005: 113)고 밝히기도 했다. 나아가 장-뤽 낭시는 모리스 블랑쇼가 공동체를 밝힐 수 없다고 표현한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밝힐 수 없는 것은 부끄러운 어떤 비밀을 가리킨다. 밝힐 수 없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가지 가능한 형상 - 최고 주권의 형상과 내밀성의 형상 - 을 통해 밝힐 수 없는 것 일반으로밖에 드러날 수 없는 정념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밝힐 수 없는 것을 밝힌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정념의 힘을 파괴할 것이다. 그 정념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든 종류의 같이-있음을, 간단히 말해 모든 종류의 존재를 이미 포기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밝힐 수 없는’은 불순성과 순결성을 여기서 떨어질 수 없게 하나로 묶어서 가리키고 있는 말이다. 그 말은 불순하게 어떤 비밀을 폭로하며, 동시에 그 비밀이 순결하게 비밀로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선언한다(장-뤽 낭시, 2005: 127-128).


대한민국의 공동체가 과연 이견을 포함하고 있을까?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서로 다른 세대와 성과 그보다 거창한 이데올로기까지 다양한 패러다임을 포함하고 있다. 공동체를 주장하는 사람이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는 특정 정치인에 대한 선호를 가치의 문제로 대입해 혐오한다면, 그 사람이 주장하는 공동체는 선택일까, 아니면 배제일까?


대한민국에서 마을공동체를 정책의 중심으로 이동시킨 사람은 故박원순 서울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는 다양한 마을공동체 사업을 추진해 왔고, 그 영향력이 그전부터 마을공동체 사업을 추진해 왔던, 아니면 뒤늦게 마을공동체 사업에 동참하기 시작했던 전국의 지방 도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박주형은 ‘서울시의 정책 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마을‘이나 ’공동체‘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낭만화하려는 전반적인 움직임에 비판적인 관점을 제기(박주형, 2013: 8)했다. 박주형은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각종 ’마을공동체 운동‘들의 홍수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구조적이고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정치기획의 일부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박주형, 2013: 8)은 아닌지 의심했다. 박주형의 의심은 공동체가 지향하고 있는 태생적 획일성을 경계하고 있는 블랑쇼나 낭시, 그리고 조르주 바타유(Georges Albert Maurice Victor Bataille)와도 맥을 같이 한다. 박주형은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과 새마을운동을 모두 권력의 ’통치기술‘이라는 관점으로 파악함으로써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을 둘러싼 실천과 담론들을 문제시하고, 탈신비화하며, 재정치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박주형, 2013: 10)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공동체 사업은 연대의 공동체라기보다는 배제의 공동체로 보인다. 지역의 아젠다를 통해 어렵게 공동체를 확장하고 나면, 거의 2년에 한 번 치루어지는 선거로 인해 공동체는 정확히 두 동강이 난다. 얼마전 대통령으로 당선된 윤석열과 대선에서 패배한 이재명을 지지하는 사람이 하나의 공동체 안에 담길 수 있을까? 정치적 취향 외에 갈수록 복잡하게 분화하고 있는 분야별 전문성은 공동체를 더욱 세밀하게 해체하기도 한다. 교육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마을교육공동체와 보건과 복지를 주제로 형성되기 시작한 커뮤니티 케어는 모두 마을공동체의 하위범주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전문성은 전문가의 요구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의 필요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하버마스에 이어 독일의 새로운 철학병기로 떠오르고 있는 루만의 말처럼 모든 전문성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확대 재생산에만 몰입한다(이철, 2015/12/23). 그리하여 대한민국에서 공동체는 가족 안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4. 마을공동체 Vs 신념공동체


수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 집합의 정의는 “특정 조건에 맞는 원소들의 모임”이다. 집합이 되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하다. 마을공동체도 하나의 집합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을공동체라는 집합을 이루는 조건은 ‘마을’이라는 지리적 조건일까, 아니면 지리적 조건을 공유하면서도 생각이 같거나 비슷해야 한다는 ‘신념의 조건’일까? 소위 마을공동체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말하는 마을공동체가 ‘마을’보다는 ‘신념’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정치권이든, 행정가든 소위 우리나라의 네임드 중 최초로 마을공동체의 중요성을 제기한 사람은 바로 故박원순 서울시장이다. 박시장이 마을공동체를 앞세워 천하를 도모하려는 웅대한 뜻을 품은 유비라면, 박시장으로 인해 물을 만난 시민사회는 모두 관우고, 장비고, 조자룡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빠른 경제 성장 속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마을공동체가 파괴되어 온 나라이고, 그 나라에서 채 시민이 되지 못한 국민들은 공동체가 주는 구질구질함보다 분리와 소비가 주는 안락함과 달콤함에 빠져 인간이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 또한 빠르게 망각해 왔다. 박시장으로 인해 간디가 무려 1세기 전에 부르짖었던 마을공동체 바람이 뒤늦게 대한민국에서도 불기 시작했다. 그만큼 마을과 공동체라는 것이 인간사회에서 기본적인 가치이기 때문이거나, 모든 것을 경제 개발에 쏟아부었던 대한민국의 특수성으로 인해 공동체의 파괴가 매우 절박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역시 대한민국 답게 마을공동체가 반공동체적인 전문성으로 평화롭게 찢어발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마을공동체를 둘러싼 진영의 분화가 그것이다. 애초부터 마을공동체가 빅텐트가 아닌 플랫폼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마을공동체를 표방한 유사 브랜드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마을교육공동체”가 그중 하나요, 복지와 의료가 만나 영어 간판으로 내 건 “커뮤니티 케어”가 또 다른 하나다.


마을공동체이든, 마을교육공동체이든 그 의미 자체에는 동의하나 '교육'이라는 단어 하나 있고 없고가 현실에서는 매우 큰 구분이 된다. 좋은 의미가 진영이 만든 신념의 구분으로 훼손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마지막으로 마을교육공동체를 가로막는 세 가지 저항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한다.

첫 번째 제도적 저항은 일반자치와 교육자치 간의 충돌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제도적으로 일반자치와 교육자치가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그 제도적 구분의 결과가 매우 자의적이며 미묘하면서도 복잡하다. 마을교육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이 제도적 저항을 어떻게 돌파할지가 관건이다. 이미 교육의 전문성이 시민이 지향하는 상식의 방향과 한참 어긋나 있는 것도 문제지만, 나아가 우리 사회에선 전문성이 밥그릇의 크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단순히 제도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두 번째 문화적 저항은 성장과 선발의 충돌이다. 성장과 선발의 균형은 마치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자유와 평등의 균형만큼 어려운 과제이다. 성장이 교육의 모든 것이었던 중세 이전과 다르게 산업자본주의에서는 선발의 필요성이 교육의 성장 기능을 압도해 왔다. 교육은 중세의 계급제도를 해체하는 혁명적 도구였지만, 현재에는 역설적으로 실력의 차이에 따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억압의 망치가 되고 있다. 이러한 역설은 비단 교육뿐만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근대와 탈근대가 충돌하는 시대적 저항이다. 공동체가 작동하려면 그 구성원의 쓸모를 인정해야 한다. 그 쓸모를 권력으로 억압해서도 안되고 신념으로 구분해서도 안 된다. 마을교육공동체가 이러한 근대성과 선을 그을 수 있다면, 그것이 마을공동체면 어떻고, 마을교육공동체면 또 어떻고, 커뮤니티케어가 된들 어떻겠는가!



5. 교육이 가지고 있는 복잡한 경계들


대한민국에서 가장 복잡하고 다양한 경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교육이다. 교육의 가장 견고한 경계는 역시 선발과 성장 사이의 경계다. 교육의 선발 기능은 근대의 산물이다. 중세 시대엔 교육을 통해 지배계급인 귀족을 선발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교육의 쓸모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자 주체는 바로 대학이다. 입시 경쟁을 뚫고 대학, 그것도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않으면 12년 간의 교육은 무용한 것이 된다. 혁신은 변방에서 시작되고, 얼음은 가생이부터 녹는다는 말이 있다. 교육의 중심부에 있는 선발과 성장 사이의 경계가 지나치게 견고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육의 다른 경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바로 마을과 학교 사이의 경계다. 마을과 학교 사이의 경계는 교육의 제도적 경계인 일반행정과 교육행정의 분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외에도 수 없이 많은 교육의 경계들이 존재한다. 교육3주체라고 하는 학생, 교사, 학부모 사이의 경계, 학교교육과 평생교육 사이의 경계, 근대 교육과 미래 교육 사이의 경계, 일반고와 자사고 사이의 경계, 지식과 정보 사이의 경계, 공교육과 사교육의 사이의 경계…

나아가 교육은 이 사회의 모든 경계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경계가 교육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미 시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성세대와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미래 세대 사이의 경계, 교육을 통해 부가 대물림되는 양극화로 인해 발생하는 경계, 가부장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남학생과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여학생 사이의 경계 등…. 이 모든 경계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교육문제를 더욱 미궁 속으로 몰아넣는다.



6. 또다시, 방법으로서의 경계


대화가 가능하다는 착각과 적어도 소통은 하고 있다는 기대는 오히려 경계를 더 단단하게 만들뿐이다. 사실 이러한 대화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경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관점이 단순히 1대 1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세포가 분열하는 것처럼 경계를 기준으로 그 안팎에서 또다시 다양한 관점의 경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교육 대상의 연령에 따라 유∙초∙중∙고∙대학 등의 경계가 만들어지고, 학문적 전문성에 따라 교육행정, 교육과정, 교육심리, 교육철학, 교육공학 등의 경계가 생성된다. 어디 그뿐이랴, 필자는 서울시교육청 어공으로 있으면서 교육 전문직과 교육 행정직이라는 매우 이질적인 경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쩌다 공무원이 된 필자 또한 그 안에서 의도와 무관하게 하나의 경계를 형성했었던 것 같다. 이렇게 교육이라는 거대한 사회 체계 안쪽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경계들은 안타깝게도 교육의 경계 밖에서는 그저 뭉뚱그려 하나의 교육 체계로 인식될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경계의 밖은 더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학문적 관점도 있을 수 있고, 교육과 강력한 이해관계로 묶여 있는 관점일 수도 있다. 교육이 오로지 교육의 관점에서 교육의 경계를 살피는 것처럼 경제는 오로지 시장의 관점, 정치는 오로지 정치의 관점에서 교육 체계의 바깥 면을 살핀다. 예컨대 정치 체계가 ‘민주시민의 소양을 충분히 양성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거나, 경제 체계가 ‘기업의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졸업생을 양산했다.’고 비난할 때 교육의 반응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교육체계는 각 체계가 나름의 필요와 수요에 따라 다른 체계의 성과, 이 경우 교육적 성과를 수용하는 특성을 인정하기보다, 비교육적 기준으로 교육을 재단하는 시도들이라 비난한다(전상진·김무경, 2010: 242-243 요약). 경계의 분화에 이해관계가 더해지면 경계의 안팎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정체성이 모호해진다. 교사와 더불어 교육의 3주체라고 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관점은 교육의 경계 안쪽에 있을까, 아니면 바깥쪽에 있을까? 공교육과 경쟁하고 있는 사교육은, 사교육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마을교육공동체의 관점은 교육의 경계 안쪽일까, 아니면 바깥쪽일까?


국가 정책의 실패로 등장한 거버넌스는 방법으로서 경계를 선택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거버넌스는 국가 정책이 실패했으므로 다시 부도덕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정책 결정 권한을 이양하자는 것이 아니다. 초기 자본주의 시절, 시장의 실패는 이미 경험하였다. 자본주의가 직면한 불확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시장이 가지고 있는 역동성과 국가정책이 가지고 있는 안정성이 모두 필요하다. 시장의 전문성과 국가의 전문성을 특정한 입장이 아닌 경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에 비유한 파스칼(Blaise Pascal)은 피레네 산맥 이 편에서의 진리가 저 편에서는 오류가 될 수 있다며, 산맥이라는 경계 위에서 진리와 오류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살폈다(파스칼, 2003: 101/831). 한의학은 인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지만, 서양의학은 몸을 나누어서 본다. 동양의 세계관은 얽힘과 연결이고, 서양의 세계관은 분리와 맞섬이다. 이철은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을 통합하여 맞선 둘은 하나라는 ‘맞얽힘’의 세계관을 주장한다(이철, 2021: 316-318).


인류의 역사 속에서 경계의 기준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우연에서 필연으로 이동했고 해서 과거의 기준이 쓸모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권력은 과거에 기준에 익숙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과거의 기준에 익숙한 개인이 존재하고 있는 한 그 기준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의 왼쪽과 오른쪽이 투쟁을 통해 헤게모니를 잡아야 한다는 근대의 역사 발전 법칙이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충분하다.  좌와 우의 경계는 세계를 폐허로 만든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을 비켜간 68 혁명을 거치면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근대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념의 경계가 힘을 잃자 더 많은 경계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새로운 경계가 근대를 양분했던 이전의 경계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경계의 하위 개념 쯤으로 인식하거나, 둘 중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경계가 감당할 수 없이 범람하고 있다면 그 경계가 나누고 있는 어떤 입장을 선택하는 대신 경계 자체를 제3의 대안적 방법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내가 선택한 그 입장이 무수히 많아진 경계로 인해 세상의 절반이 아닌 무한대에 수렴하는 분모 n분의 1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을교육공동체 또한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체계들을 살피기 보다 그 경계 위에서 교육과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김세희 외(2016). “2017 서울형혁신교육지구 주요 운영 방침 연구”. 『서울특별시교육연구정보원』.

박주형(2013). “도구화되는 ‘공동체’ 서울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에 대한 비판적 고찰”. 『공간과 사회』 23(1), 4-43.

송순재2006). “한국에서 대안교육의 전개과정, 성격과 주요 문제”. 『신학과세계』 56, 156-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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