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백수 채희태 Sep 15. 2022

PD수첩, "김순호 경찰국장, 그는 밀정이었나?"

지난 9월 14일(화) 밤 10시 30분, MBC PD 수첩은 굥정부의 경찰국장이자 밀정 의혹을 받고 있는 김순호에 대한 탐사 보도를 내보냈다. 방송을 보는 내내 한마디로 딱 꼬집어 표현할 감정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분노? 답답? 그도 아니면, 그럴 수도 있다는 이해? 그 정확하지 않은 감정을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겠기에 무작정 노트북을 열었다.


다시, 중립에 대하여...

약 10여 년 전부터 내가 자주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다. 통앤통이라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통기타 커뮤니티로 회원 수가 무려 15만 명을 훌쩍 넘는다. 주로는 중고 장터 기능을 하지만, 열심히 활동하는 오래된 회원들 사이에는 적절한 친목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회원 수가 워낙 많다 보니 당연하게도 중고 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회원과 회원 간, 또는 회원과 업체 간 분쟁이 잦은 편이다. 먼저 한 회원이 자신의 기준으로 타자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보통은 공감의 댓글이 달린다. 이내 그 회원으로부터 ㄱㅅㄲ로 몰린 다른 회원이나 업체의 반박글이 올라온다. 조선시대 황희 정승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면 또 그 사람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언젠가부터 누군가에 대한 저격글이 올라오면 많은 회원들은 이렇게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일단 중립 기어 박겠습니다.


학생운동 언저리를 서성였던 학창 시절 난 선배들로부터 진정한 중립은 없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믿었다. 남성이 여성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힘이 센 자가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폭력을 방관함으로써 폭력에 가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 믿음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혹시... 섣불리 입장을 정하지 않는 나의 태도와, 입장과 입장의 경계에서 실체적 진실을 살피고자 하는 나의 노력은 비겁한 중립일까?


중립의 이동...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다양한 색들이 서로 뒤엉켜 있는 총천연색 칼라의 시대라면,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0, 90년대는 회색의 존재를 부정했던 흑백의 시대였다. 혹시라도 흑과 백의 경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하면 회색분자, 개량주의자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난 마음속으로는 늘 흑과 백의 경계에서 고민했지만, 표면적으로는 회색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면서 중립은 절대 변하지 않는 가치에서 그럴 수도 있는 취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덥지 않은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삼원색 중 하나인 빨강은 흰색과 만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핑크가 되었다. 하지만 빨강이나 하양은 자신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핑크가 더 사랑받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토록 사랑스러운 핑크는 어쩌면 빨강과 하양에게는 저주스러운 색깔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핑크는 너무 아름다운 비유고... 그렇다면 흑백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회색은 어떨까?


회색은 흑에게나 백에게나 늘 비난의 대상이었다. 흑과 백이 사물의 본질이고 사건의 팩트라면 회색은 현상이고 인식이다. 대중들은 흑과 백을 섞어서 회색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백이 옳으니 흑이 옳으니 떠들어 대고 있는 꼴이다. 세상의 본질이 흑과 백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저 총체적으로 회색이다. 회색을 두고 흑에 더 가까우니, 백에 더 가까우니 떠들어 봤자 인류의 미래보다 자신이 먹고사는 문제가 더 절박해진 신자유주의 포스트모던 사회의 대중들은 이 세상을 대충 회색으로 인식하고 있다. 회색에 대한 진정한 고민과 성찰 없이 이루어지는 모든 주장은 운동이 아니라 찻잔 속에서 찻잔조차도 흔들 수 없는 파편적 회오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확신과 의심...

난 신이 아닌 한낱 인간이 자신의 신념에 지나친 확신을 갖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과거 원시 인류는 자연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오랫동안 미신에 의지해 왔다. 농경을 통해 어느 정도 자연을 이해하게 된 인류는 마침내 미신에서 벗어나 그럴듯한 신을 믿게 되었고, 그럴듯한 신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중세는 인간에게 길고 긴 암흑기를 선사했다.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확신은 과학문명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인간이 개입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우리는 필연이라고 부른다. 즉, 인간이 관여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의 영역이다. 과학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우연의 영역을 끊임없이 필연의 언어로 해석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의도와 무관한 강력한 덤이 발생했다. 바로 우연마저도 필연으로 인식하는 인간의 오만이다. 오만은 의심이 아닌 확신으로 이어진다. 불과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에 반하는 모든 합리적 의심들을 억압했다. 어쩌면 단지 이익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를 신념이 백 년이 지나고,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때때로 인간을 괴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는 시대와 상호작용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지나친 확신을 갖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실한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오류다. 평생을 종손 며느리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8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식들 뿐만 아니라 며느리에게까지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운 억지 신념을 들이대실 때가 종종 있다. 불편하고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어머니를 비난하거나 미워할 수는 없다. 다만 가급적 며느리와의 접촉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친일과 항일의 신념이 충돌했고, 6・25 전쟁 때의 좌익과 우익의 신념이 충돌했다. 그리고 3~40년 전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는 시대를 바꾸려는 진보의 신념과, 시대를 유지하려는 보수의 신념이 강하게 충돌했다. 이렇게 해묵은 신념이 만들어 낸 다양한 확신들은 - 마치 중세를 지배했던 종교처럼 - 여전히 남아 인간과 괴물의 영역을 넘나들며 현실 세계를 억압한다.


김순호도 인간이기에 개인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대해 염증을 느꼈을 수 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PD 수첩 전반부 31’ 30“

인천부천 민주 노동자회 회원이었던 박종근 씨의 말대로 김순호의 행위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잘못의 범주로 이해받으려면 노동운동에 염증을 느꼈을 때 그냥 조용히 떠났으며 되었다. 하지만 김순호는 자신과 인간적인 친밀함을 나누었던 지인들까지 밀고하며 자신이 부정했던 과거를 출세의 사다리로 이용했다. 인간이 아닌 괴물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김순호의 이러한 행위가 과거 인종 학살을 자행했던 나치와 무엇이 다른가!


법치국가에서는 적어도 본인이 직접 범하지도 않은 죄를 물을 수는 없다. 독일의 나치 청산은 그 유명한 68 혁명의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나치의 잔당들은 68 혁명 당시까지도 팔팔하게 살아 남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난 친일파 청산은 정치적 이해득실이 따르는 구호일 뿐, 이미 역사적으로는 그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친일파의 자식과 손자들이 친일파 부모나 할아버지를 선택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김순호는 다르다. 김순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었고, 그 길을 내닫기 위해 노동해방과 민주주의를 외치던 많은 지인들과 그리고 자신을 가장 아끼던 선배였던 최동 열사의 피를 뿌렸다. 아무리 중립의 기준이 과거와 달라졌다지만, 이러한 사실을 낱낱이 파헤친 PD 수첩을 보면서도 제대로 분노의 감정조차 선택할 수 없는 내가 낯설었다. 나 또한 분노하지 않음으로써 괴물로 살아온 김순호마저도 이해하려는 중립적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여전히 찜찜하다...

내가 PD 수첩을 보며 정확한 감정을 선택하지 못했던 이유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연결할 끈이 사라졌거나 옅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김순호의 고발로 구속되어 끝내 분신으로 생을 마감한 "최동 열사"는 개인적으로 얼굴도 보지 못했던 같은 대학, 같은 과 선배였다. 1990년 난 군대를 가기 위해 휴학을 한 상태였고, 군대를 가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닌 부모님의 의지였기에 난 매일 학교에 나가 학생회 활동을 하고, 온갖 집회를 따라다녔다. 차마 도바리를 칠 용기는 없었지만, 최소한 군대에 가기 전까지만이라도 당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신념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8월 어느 날 최동 열사의 분신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그때의 분노도 희미해져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최동 열사의 영결식 때 노제를 막아서는 전투 경찰과 맞서 싸웠고, 기어이 망월동 묘지까지 따라가 최동 열사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언젠가부터 난 더 많은 선, 후배, 동기들을 볼 수 있는 김귀정 열사 추모제에는 참석했지만, 우리 과 선배인 최동 열사 추모제에는 발길을 하지 않았다. 내가 최동 열사 추모제에 계속 참석했었더라면 괴물로 살아온 김순호에 대해 더 당당하게 분노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못했던 나의 자격지심이 김순호가 최동 열사를 죽음으로 내몬 밀정이었다는 PD 수첩의 차고도 넘치는 정황 증거를 보고도 어떤 감정을 선택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나를 만든 것은 아닌지…


시대가 어떻게 변했든 과거에 가졌던 신념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32년 전 나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내년부터는 최동 열사 추모제에 열일 제쳐놓고 참석을 해야겠다. 김순호처럼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MBC PD수첩, "경찰국장, 그는 밀정이었나?"는 두 편으로 나뉘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달라진 중립의 잣대로 김순호가 밀정이었는지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


"경찰국장, 그는 밀정이었나?" 전반부


"경찰국장, 그는 밀정이었나?" 후반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