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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Feb 26. 2023

명문대 합격증, 나만 불편한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다양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지인 자녀들의 대학 합격 소식이 올라온다. 가끔은 자랑스럽게 합격증을 첨부하기도 한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라오는 자녀의 대학 합격증은 소위 명문대라고 불리는 소수의 대학뿐이다. 난 지인의 그 소식에 기꺼이 "좋아요"를 누르면서도 복잡한 감정에 빠지곤 한다.


"자랑스럽게 합격증을 올릴 수 있는 명문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자녀뿐만 아니라 부모는 또 얼마나 몸고생, 맘고생을 했을까?" 하는 안쓰러움과 함께, "평소 마르고 닳도록 대한민국 교육과 입시 제도를 비판하면서 왜 하나같이 그 지옥행 열차에 올라타지 못해 안달을 하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까지...


표준화 계약은 개인의 성공을 단순하고 선형적인 판단으로 평가하도록 내몬다.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가로 성공을 따진다. 이런 식의 성공 해석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찌어찌해서 사다리 맨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은 남들에 비해 무진장 행복할 것이라고 당연시한다. 애초에 사다리를 오른 목적이 개인적 충족감이라는 최종 목표의 쟁취이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NFL(미식축구) 선수나 할리우드 배우가 자신들의 운명을 불만스러워하면 동정을 보내지 않는다. ‘유명세도 얻고 돈도 쌓아놓고 살면서 우울하다고?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천한 직업을 갖게 된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도 냉소적 태도를 보인다. 결국 행복은 승자의 몫이야!

- 알라딘 eBook <다크호스> (토드 로즈・오기 오가스 지음, 정미나 옮김) 중에서


혹시 <드래곤볼>이라는 만화를 본 적이 있는가? 주인공 손오공은 재미로 드래곤볼을 모으기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점점 더 강한 힘을 얻게 되지만,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 강력한 빌런과 마주하게 된다.

왼쪽 위부터 화살표 순으로 쿠오빠이, 천진반, 피콜로 대마왕, 베지터, 프리더, 인조인간, 셀, 마인 부우. 마인 부우가 이종 격투기 최강자 표도르라면 쿠오빠이는 개미 수준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인터넷을 통해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던 것처럼, 과거엔 분절된 공동체 안에서 맴돌던 학벌에 대한 왜곡된 기대가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확산된다. 30여 년 전 목숨을 걸고 민주화를 외치던 기성세대들은 이제 -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 자신들이 이룬 민주화의 재단 위에 무한 경쟁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오력, 성공, 행복의 상관관계

"노오력"하면 성공할 수 있고, 성공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화"는 자본주의를 떠받들고 있는 가장 강력한 아비투스(문화 권력?)다. 이 아비투스를 내가 당연한 공식이 아닌 신화라고 칭하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서로의 인과 관계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하여 애를 쓰(표준국어대사전)"는 노력의 기준은 절대적일까, 상대적일까? 난 얼마 전 고2 딸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노오력"의 기준이 지극히 상대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난 30여 년 전 지금 딸이 하는 노력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노력을 하고도 인서울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기준이라면, 그 기준을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죽하면 하완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고 했을까?


반면 "노오력"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성공의 "비율"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성공의 비율을 대입으로만 국한하면 과거에는 "SKY"였고, 지금은 "in 서울"이다. 그 정해져 있는 비율 안에 들어가기 위한 절대적 노력의 기준은 사실상 없다. 마치 3루에서 태어나 3루타를 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SKY나 in 서울에 안착한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운까지 따라야 한다.


행운이란 과연 얼마나 중요할까?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이보다 확실하게 구분하는 질문도 없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재능이 뛰어나고 엄청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의 지적대로, 비슷한 재능으로 비슷하게 노력하는 다른 수많은 사람은 왜 그만큼 부를 이루지 못할까.

-알라딘 eBook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로버트 H. 프랭크 지음, 정태영 옮김) 중에서


마지막으로 행복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이야기할 때, 다른 사람이 느낄 박탈감은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 행복이 자신이 노력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 굳기 믿기 때문이다. 근대교육이 만든 능력주의(meritocracy)는 이제 완벽하게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모든 사람이 연결되어 있는 온라인 네트워크는 상대적 기준이었던 행복을 철저히 해체한 후 비교를 통해 절대화시킨다.


2011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힌 부탄이 8년 뒤 2019년 조사에서는 95위로 하락하며 행복지수가 급락했다. 이유를 살펴보니 급격한 도시화로 부탄에 인터넷과 SNS 등이 발달하면서 국민이 자국의 빈곤을 알게 되고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행복지수가 급락한 것이다.

- 장수아 기자. "부탄의 행복지수가 급락한 까닭" <중앙일보>, 2022/6/6.


명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고생스럽게 공부를 해 온 자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부모라면, 자녀의 그 노력이 결실을 보았을 때 어떤 형태로든 알리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걸 탓할 수는 없다. 다만 나의 모든 행위가 빅데이터의 재료가 되는 이 시대엔 그 인지상정이 비교의 데이터가 되어 행복의 기준을 절대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 기준을 안드로메다로 끌어올릴 수 있음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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