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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Jan 02. 2024

미래교육지구의 추억 4

성과지표, 격차,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4. Post-미래교육지구


성자와 헤어진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니체는 왜 신이 죽었다고 이야기했을까? 니체가 죽었다고 이야기한 신은 지배의 명분으로 신을 내세웠던 중세의 질서를 의미한다. 상인들이 부르주아혁명을 일으켰다고 해서 곧바로 근대가 시작되었을까? 사실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중세의 구체제(앙시앵 레짐)는 여전히 살아남아 근대로의 이행을 끈질기게 방해했다. 아마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하며 중세의 질서를 허무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근대로의 이행은 훨씬 더뎌졌을 것이다.


근대의 오만이 초래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인류는 포스트모던을 통해 근대적 이성에 대한 성찰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라는 오래된(Ancien) 체제(Régime)는 여전히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을 끈질기게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최전방에는 역시 근대적 속성으로 무장한 "교육"이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에서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본주의야말로 가장 비합리적 종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중세의 계급 질서를 정당화했던 것이 종교와 교리였다면, 자본주의에서는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고 말했던 교육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나아가 교육이 오로지 교육 체제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시대, 우리는 달라진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육의 새로운 쓸모를 합의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아렌트의 조언대로 합의로 나아가기 위해선 먼저 각자의 생각을 감추지 않고 드러낼 필요가 있다. 내가 쓰는 이 비루한 글은 감히 합의도 되지 않은 교육의 가치를 주장하고자 함이 아니라, 교육의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나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① "미래"와 "혁신"을 바라보는 동상이몽

2024년 새해가 밝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교육부가 2020년부터 풀뿌리 교육자치 실현을 위해 추진해 왔던 "미래교육지구"도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마침내 교육자치를 풀어가야 할 주체가 중앙정부에서 풀뿌리 자치단체로 넘겨진 것이다. 그동안 교육부가 추진해 온 교육자치의 동력은 풀뿌리에 있었을까, 아니면 돈이라는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중앙정부에 있었을까? 풀뿌리도, 교육자치도 원하지 않았던 교육부는 "미래"라는 애매하고도 모호할 뿐만 아니라 매우 무책임한 단어를 교육의 수식어로 선택했다.


독일의 역사학자 코렐렉은 미래는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에 있으며, 미래가 현실이 되면 그 현실의 미래 또한 지평선 너머로 숨어 버리기 때문에 미래는 영원히 불확실한 기대 속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교육부가 생각하는 미래가 과연 교육청이나 학교, 그리고 소멸을 걱정하고 있는 지방의 작은 도시가 그리는 미래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미래는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의 합의되지 않은 동상이몽이 숨어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합의 없이 던져지는 미래라는 단어는 그 누구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미래라는 단어는 이익이라는 속내를 간편하게 숨기면서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사용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모든 이견은 인정과 존중의 대상이지만, 권력을 동반한 이견은 투쟁의 대상이다. 만약 중앙정부가 공모라는 권력행위를 통해 다양한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풀뿌리를 중앙정부의 기준으로 줄 세우려 한다면, 이를 단순히 이견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까?


미래 이전에 교육을 수식해 왔던 "혁신"이라는 단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듯 많은 지역에서 혁신을 혁신이라 부르지 못하고 다른 이름으로 혁신교육지구를 포장했던 이유 또한, "혁신"이라는 단어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좌와 우가 경제적 성장을 위한 이견이 아닌, 서로 배척하고 나아가 반드시 소멸시켜야 할 정치적 대상으로 여겨왔던 대한민국은 ‘혁신’이라는 단어에 대한 인식도 양극화된 상태로 존재해 왔다. 혁신이라는 단어는 언젠가부터 진영을 가르는 표식이 되었고, 그래서 누군가는 그 말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경기를 일으키며 경계하기도 한다. 이러한 두 경향성은 애초에 혁신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었던 ‘랑그’와는 무관하게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 ‘파롤’이 이념과 결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민족국가를 기반으로 형성된 근대에는 ‘랑그’의 힘이 강했겠지만, 개인이 집단을 압도하고 있는 현재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파롤’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에 나는 ‘혁신’이라는 랑그에 대한 합의를 먼저 시도해 보겠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동물의 가죽을 이용해 왔다. 주지하다시피 피(皮)와 혁(革)은 모두 동물의 가죽을 뜻하는 한자어이다. 이미 ‘피’라는 한자어가 있는데 왜 중국 사람들은 굳이 ‘혁’이라는 한자어를 또 만들어 사용했을까? 마치 매일 보는 눈(雪)을 구별하기 위해 백 개가 넘는 단어를 사용하는 에스키모처럼 같은 가죽이라도 구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자(文字)의 어원으로 잘 알려져 있는 허신의 설문해자(設文解字)에서는 피와 혁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 놓았다.

피(皮): 짐승의 가죽을 벗긴 것
혁(革): 짐승의 가죽에서 털을 제거한 것

동물에서 벗겨낸 자연 그대로의 가죽에 인간의 수고로운 노동이 더해져 털을 제거한 것이 바로 혁(革)이다. 혁신이라는 말은 근거도 없이 막연한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시작된 누군가의 주장처럼 사람의 가죽을 벗겨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혁신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아마도 혁이라는 단어가 애초에 시작된 의미와 무관하게 한때, 혁명(革命)이라는 강력한 단어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현실에서는 혁신이라는 ‘랑그’와 무관하게 혁명을 좋아하는 사람은 혁신도 좋아하며, 혁명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은 혁신도 거부하는 ‘파롤’이 되었다.

혁신은 언젠가부터 사회의 보편적 성장과 무관하게 존재해 온 다양한 사회적 체계가 다시금 사회적 쓸모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을 사회의 일부가 아닌 사회 환경의 일부라고 주장한 니클라스 루만의 말처럼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회적 체계들이 자신의 확대재생산에만 몰입하게 되면서 ‘혁’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피’가 되었기 때문이다. 혁신은 진보의 전유물도 아니고, 보수가 공격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혁신은 특정한 가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가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각자의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채희태, 2020. 범람하는 거버넌스에 관한 小考. NGO연구 15(1) 중에서)


난 교육 거버넌스 갈등 사례를 연구하며 거버넌스란 현실의 이해관계가 아닌 미래를 합의하는 것이라고 제안한 바 있다. 시간이 걸리고, 크고 작은 다툼이 있더라도 미래에 대한 합의를 시도할 수 있다면 미래는 제법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초인 소쉬르가 처음 사용한 낱말들로, 언어활동(불어: langage)에서 사회적이고 체계적 측면을 랑그라고 하였고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발화의 실행과 관련된 측면을 파롤이라고 불렀다. 랑그와 파롤은 서로 상반되지만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하자면 파롤은 같은 내용의 언어가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실제 발화 행위이며, 이러한 다양한 파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랑그이다. (위키백과)


② "교육 격차"에서 벗어나기

정보가 범람하는 불확실한 사회 속에서는 선한 의도가 악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고, 반면 악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역사에 관심을 갖게 만든 건 한국사를 국정교과서로 만들려고 했던 박근혜와 홍범도 장군을 빨치산으로 몰아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지우려고 했던 윤석열의 악한(?) 의도였다. 반면, 일반고를 살리고자 했던 조희연 교육감의 선한 의도는 역설적으로 일반고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교육 격차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역설적 결과에 직면한다. 교육 격차를 줄이려고 하는 그 순간 교육 격차는 존재감을 가지고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신이 만든 중세의 우연이 아니라, 이성에서 비롯한 필연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류의 근대적 사고에 대해 “행동경제학”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인간은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믿지만 결코 그렇지 않으며, 그 까닭은 인간이 빠른 직관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교육을 중심으로 파생되는 대부분의 사회 문제 또한 교육이 매우 이상적이고, 합리적일 것이라는 기대에서 비롯한다.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사실 교육 격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교육 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격차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이라는 것이 격차가 벌어지지 않도록 낮은 천장을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천장을 뚫고 안드로메다로 향하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가야 한다고 뒤처진 사람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 2021년 6월 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2020년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발표하며 코로나19로 인한 등교 축소로 지난해 교과별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학년과 과목에 따라 많게는 갑절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학업성취도 평가는 학생들이 국가 교육과정의 교육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으로, 매년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약 3%(지난해 2만 1179명)를 대상으로 실시된다.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9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코로나19 교육 분야 대응 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마치 제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머지않은 미래에 대부분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며 공포감을 조성했던 2016년 다보스포럼이 떠오른다. 인류는 제4차 산업혁명을 통해 드디어 농경에서 시작된 고단한 노동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해 노동을 해 주겠다는데 그게 과연 공포에 떨 일일까?


정부는 부동산 경기를 억제하거나 부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동산 정책을 발표하는 경우가 잦다. 그때마다 궁금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부동산을 보유하지 못한 국민을 위한 것일까? 코로나로 인해 기초학력이 저하되었다며 교육의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하고 싶다. 학력은 기성세대, 그중에서도 교육전문가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존재 이유일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소위 교육전문가들이 자신이 아닌 아이들을 위해 교육의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자처하려면 학력 저하를 걱정하기 전에 학력이라는 것이 아이들의 행복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하지 않을까?


5. Epilogue

해가 바뀌니 몸도 마음도 작년 같지가 않다. 에필로그를 통해 풀어내 보고 싶은 이야기가 몇 가지 더 있으나, 스스로 짊어진 연재라는 짐을 빨리 벗어 버리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하여 일단은 이것으로 미래교육지구의 추억 연재를 마무리하고, 혹시라도 생각이 손끝에 몰리게 되면 에필로그를 다시 추가하도록 하겠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그 끝이 심히 미약하여 송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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