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은...
과거의 내가 썼던 글들을 끄집어 내 보여준다.
복고(retro)는 현재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등장하는 사회 현상 중 하나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당면해 있는 현실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더이상 페이스북에 글을 쓸 수가 없다.
대신,
과거의 오늘, 내가 페이스북에 싸질렀던 글들을 보며
지금의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의미를 찾아 보려 한다.
2019년 8월 9일, 교원대에서 열렸던 <교육자치 컨퍼런스> 주제 발표 후기
피곤하다.
하루가 ‘훅’ 하며 지나갔다.
주제 발표를 하고,
다소 이질적(?)인 쟁점 토론이 이어졌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돈이 아니다.
제도도 아니다.
지나치게 넉넉한 부와,
그 부가 제공한 안락함과,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과분한 제도...
가장 부족한 건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시민의 성장?
근대의 시민이 투쟁의 과정에서 성장했다면
탈근대 시민의 성장은 성찰 속에서 이루어진다.
토론회 마지막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 삐져 나왔다.
이성적으로는
주제발표와 쟁정토론의 방향이
토론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어긋났기 때문이고,
감성적으로는
온수초 교장을 하고 있는 영식이형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교장 나가면 공모제 교감으로 나를 데려가겠다고 말했던 사기꾼…
관료는 일을 하면 할수록 감시의 대상이 된다.
그런 과정을 충분히 경험한 관료들이
자신의 열정을 내려놓는 데는 그닥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내가 어공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내가 늘공이었다면 나의 논리는 타도 거버넌스를 향했을지 모른다.
30년 가까이 그런 과정을 무수히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어공보다 더한 열정을 보여주었던 늘공이 바로
나의 거버넌스 파트너였던 양영식이다.
아내가 병들어 가는 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무식하게 열정만 불 살랐다.
그 처참한 노력을…
우리는 그저 당연한 인간의 도리쯤으로 여긴다.
양영식은 서울형혁신교육지구 거버넌스의 최대 피해자다.
그리고 가해자는 바로 나와 우리와 그리고,
기계적으로 진보교육의 길을 걷고 있는 서울시교육감…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우리는 사람 자체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은 당연하고,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은 적으로 인식한다.
볼테르는 나는 당신에 의견에 반대하지만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함께 싸우겠다고 했다.
자신의 신념을 마치 종교처럼 의심하지 않고 살고 있는 우리는
300년 전 프랑스에서 살았던 한 작가의 통찰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토론회 중에 동작구청 김한수 교육전문관이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남겼다.
교사들은 거버넌스에 관심이 없지만,
공무원들은 거버넌스를 싫어한다고...
내가 필요하다고 상대방도 닥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는 신념의 폭력이다.
그것이 거버넌스라면, 난 그런 거버넌스와 투쟁할 것이다.
관심이 없다지 않는가, 아니 하기 싫다지 않는가!
그런 주체와 거버넌스를 하려면 당위의 주장이 아닌 편익을 제공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공무원에게 시민의 가치를 위해서 일하라고 요구하려면
시민은 공무원의 승진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것이 거버넌스라고…
나는 주제발표를 통해
주체와 주체가 수평적으로 만나는 것이 거버넌스라고 제안했는데,
쟁점토론에서는
나라는 ‘주체’가 주체가 아닌 ‘대상’과 만나는 거버넌스로 키를 고정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을교육공동체…
마을이라는 진영에서 바라본 마을교육공동체와
기대와는 달리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는 교육진영의 입장에서 바라본 마을교육공동체는 다른 것 같다.
애써 위안을 하자면,
우리는 모두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 존재하고 있으니
어제의 토론 또한 매우 중요한 과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