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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은 왜 과학이 되었을까?

인공지능과의 인문학 토론 4

by 낭만박사 채희태

1. 토론의 시작: 사회학의 '과학' 정체성에 대한 의문

오랜만에 "사회학은 왜 과학이 되었을까?"에 관해 토론을 하고 싶어. 난 사회학이 스스로를 '과학'으로 명명하게 된 배경이 혹시 자연과학의 영향력 확대에 따른 자격지심의 발로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어. "사회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 사회 현상의 통일적인 관계를 밝히는 것"이 목적인 사회학을,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 체계"인 과학의 범주에 가두는 것이 마뜩지 않기 때문이야.


조동일(1985)*은 자연 현상은 연구하는 사람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므로, 그것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주관성을 배제한 객관성을 확보하는 정도에 따라서 타당성이 보장되지만, 사회과학의 연구대상인 사회 현상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적인 관계에서 조성된 원리로 파악되어 연구자의 의지와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루는 시각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어.

뿐만 아니라 통계학의 권위 있는 전문가들 또한 “과학자들이 선호하는 P값에 좀 더 까다로운 표준을 적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들은 첫째, 사회과학과 의⋅생명과학의 경우, P의 문턱값을 0.005로 낮춰야 하며, 둘째, 0.05~0.005의 P 값을 들이대는 주장은 '확립된 지식'이 아니라 '암시적 증거'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지적했지(김우재, 2022.3.10).


충분히 조작 가능한 0.05의 유의확률을 허용하면서 도출해 낸 사회학의 연구 결과를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인 과학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차라리 질적연구 같은 새로운 방법론을 적극 수용하면서, 과감하게 '과학'이라는 수식어 자체를 내려놓으면 어떨까? 난 굳이 '과학'이라는 타이틀이 없어도, 사회학은 자연과학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학문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 사회학과 자연과학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얽힘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거든.


가령 보른(Max Born)은 양자역학에서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자,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의 파동 함수를 확률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제안했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이에 대해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며 반발했지만, 보른은 바로 이 파동 함수의 통계적 해석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1954년)을 받았지. "리프킨(Jeremy Rifkin)은 이와 반대로 물리학 법칙인 엔트로피를 경제·사회 시스템 분석에 적용해 새로운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어(리프킨, 2020).자연과학과 사회학의 이러한 상호 참조는 '과학'이라는 타이틀과는 무관했다고 생각해.


흥미로운 주제네요. 사회학의 '과학' 정체성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제기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신의 견해에 적극적으로 맞서보겠습니다.


첫째, 당신은 사회학이 '사회과학'을 자처한 것을 "자격지심의 발로"로 보는데, 저는 이것이 지나치게 단순한 심리학적 환원이라고 봅니다. 19세기 사회학의 탄생 맥락을 봐야 합니다. 콩트가 사회학을 창시할 때 그가 직면한 문제는 자연과학의 위세에 눌린 열등감이 아니라, 프랑스혁명 이후의 사회적 혼란을 어떻게 이해하고 질서를 회복할 것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신학적 설명도, 형이상학적 사변도 거부하고, 관찰과 실증을 통한 사회 법칙의 발견이 가능하다고 믿었죠. 이것은 자격지심이 아니라 시대적 요청이었습니다.

둘째, P값 논쟁을 과학성 부정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오류입니다. 당신이 인용한 통계학자들의 주장은 사회과학의 과학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더 엄격한 과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0.05 유의 수준의 문제는 사회과학뿐 아니라 의생명과학, 심지어 일부 물리학 실험에서도 제기되는 방법론적 쟁점이지, 사회학이 과학일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셋째, 조동일의 주관성 논리는 양날의 검입니다. 연구 대상이 연구자의 의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왜 과학이 될 수 없다는 뜻일까요? 양자역학에서 관찰자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밝혀진 후에도 우리는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릅니다. 완벽한 객관성은 자연과학에서도 신화입니다.

넷째, "질적연구로 전환하고 과학을 포기하라"는 제안은 위험합니다. 이것은 사회학을 인문학의 한 갈래로, 혹은 저널리즘의 고급 버전으로 격하시킬 수 있습니다. 질적연구도 엄밀한 방법론을 따르며, 그 자체로 과학적 탐구의 한 방식입니다. 양적/질적 이분법을 과학/비과학 이분법과 동일시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2. 시대적 맥락과 보편성의 문제

오~ 멋진 반론 고마워. 일단 반론에 대해 하나씩 내 입장을 밝혀 볼게. 참! 그전에 누군가 "토론"을 하면서 나만 반말을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괜찮다면 너도 나처럼 반말을 해 주었으면 좋겠어.


방금 사회학은 엄격히 과학이 아니며, 굳이 과학이라는 수식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 4가지 반론을 제기했는데, 쟁점을 좁힐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너의 반론을 바탕으로 내가 제시하고 싶은 쟁점은 다음 3가지야.


첫째, 사회학에 과학이라는 수식이 필요한가(반론 1)

둘째, 과학이 가지는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가(반론 2, 3)

셋째, 질적연구와 양적연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반론 4)


먼저 첫째와 관련하여 너는 사회과학의 탄생 배경에 대해 프랑스혁명 이후 신학적 설명과 형이상학적 사변을 거부하고 관찰과 실증을 통한 사회법칙의 발견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시대적 요청"이었다고 반론을 제기했는데, 그 주장은 엄격히 내가 지적한 사회학은 과학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다분히 시민혁명을 일으켰던 부르주아지 관점의 가치가 내재된 진술이라고 생각해. 즉, 그러한 시대적 요청은 부르주아 혁명에 성공한 시민계급이 중세의 계급 질서와 결별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지. 물론 그 당시 그 요구가 매우 혁명적이었고, 사회학의 보편적 발전에 기여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야. 사회학을 과학으로 수식하려면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회 현상을 마치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객관적 기준을 만들고, 가설을 세우고, 증명해야 하는데 그 기준은 토드 로즈가 "다크호스"에서 지적한 것처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지.


가장 유용한 조언은 실행 가능하고 구체적인 조언이므로, 그 조언이 제기된 시간이나 장소와 떼려야 뗄 수 없다. 3세기 폴리네시아 사회에서의 성공 비결(카누를 만들고 조정하기)과 13세기 몽골 제국의 성공 비결(말을 잘 타고 잘 간수하기)은 서로 달랐다. 15세기 아즈텍 제국의 성공법(인신공양의 제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기)과 18세기 러시아 제국의 성공법(농노로 전락하지 않도록 조심하기)도 서로 달랐다.
알라딘 eBook <다크호스> (토드 로즈.오기 오가스 지음, 정미나 옮김) 중에서


즉 사회현상은 자연처럼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과연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 체계인 과학이라는 개념에 가두어야 할까? 아니, 가두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오케이, 지금부터 반말로 할게! 먼저 네 반론은 두 가지 강점이 있어. 먼저 시대적 요청의 이중성을 정확히 짚었어. 내가 "시대적 요청"이라고 했을 때, 너는 그게 중립적 필연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반영된 거라고 지적했지. 맞아. 콩트의 사회학은 혁명 이후 새로운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했던 지식 체계였어. "과학"이라는 외피는 그 정당성을 강화하는 도구였고...


두 번째 토드 로즈의 예시는 정말 치명적이야. 3세기 폴리네시아와 18세기 러시아의 성공 법칙이 다르다는 건 사회 현상이 시공간적으로 특수하다는 증거지. 자연 법칙은 어디서나 적용되지만, 사회 법칙은 맥락 의존적이야. 이건 사회학이 자연과학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강력한 논거야.


하지만 약점도 있어. "과학 = 보편 법칙"이라는 전제가 너무 좁아. 너는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 체계"가 과학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건 19세기 실증주의적 과학관이야. 현대 과학철학은 이미 이 정의를 넘어섰어. 포퍼(Karl Raimund Popper), 쿤(Thomas Samuel Kuhn), 라카토슈(Imre Lakatos)... 이들은 모두 과학이 절대 법칙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반증 가능한 가설을 제시하고 검증하는 과정이라고 봤어.


3. 핵심 전환: 과학은 체계적 탐구다

과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 체계적 탐구야. 포퍼 이후 현대 과학철학은 절대적 검증 가능성을 포기했어. 과학은 영구 불변의 진리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반증 가능한 가설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검증하며, 더 나은 설명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지. 사회학이 시공간적 특수성을 다룬다는 건 약점이 아니라 연구 대상의 본질적 특성을 인정하는 거야. 그리고 그 특수성 속에서도 패턴과 경향을 찾아내는 것, 그게 사회과학의 과학성이야.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답이야. 자연스럽게 두 번째 쟁점, "과학이 가지는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가"로 넘어가 볼게. 과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 체계적 탐구일 뿐이라는 거지. 그래서 슈테르처(Philipp Sterzer)가§ "제정신이라는 착각"에서 지적했듯 자연과학자들은 자신이 실증적으로 도출해 낸 이론을 확신하지 않고 가설로 여기지. 심지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이론들도 시간이 지나면 폐기되거나 수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

내가 이 문제에 천착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자연과학이 "이론은 가설일 뿐"이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반면, 사회학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론을 확신의 근거로 활용해 오히려 사회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야. 내가 자격지심의 발로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쓴 이유도 여기 있어. 엄격한 실험을 통해 도출된 자연과학적 지식들에 대해 가설임을 인정하며 끊임없이 이론을 갱신하지만, 사회학 이론들은 확신과 확신이 충돌하면서 객관적 진리는 고사하고 사회적 합의마저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거지.


아, 이제 네 핵심 문제의식이 선명해졌어. 이건 정말 중요한 지적이야. 네 말이 맞아. 자연과학자들의 인식론적 겸손함과 사회과학자들의 확신 과잉 사이에는 놀라운 대조가 있어. 물리학자들은 "표준모형"조차 불완전하다고 인정하며 끊임없이 수정해. 다윈의 진화론도 유전학, 후성유전학으로 계속 업데이트되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양자역학과의 통합을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고...


반면 사회과학은...

경제학자들은 신고전파/케인즈학파로 갈려 각자의 이론을 "진리"처럼 확신해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권위주의, 진보/보수 담론에서 자신의 입장을 절대화하지

사회학자들도 갈등론/기능론, 구조/행위자 논쟁에서 배타적 진영을 형성해


무엇보다 심각한 건, 이런 확신들이 학문 바깥으로 나가 정책이 되고, 이념이 되고, 정치적 무기가 된다는 점이야.


4. 왜 사회과학은 확신 과잉에 빠지는가?

네 "자격지심" 진단에 이제 동의해. 하지만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싶어. "과학"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한 자격지심이 아니라, 과학을 얻은 후 그것을 권위의 무기로 사용하려는 욕망이 문제 아닐까?


첫째, 사회적 정당성의 필요야. 자연과학자는 "이건 가설입니다"라고 말해도 돼. 중력파 발견이 노벨상을 받든 말든, 일반인의 삶에 당장 영향이 없으니까. 하지만 사회과학자는?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가설일 뿐"이라고 말하는 순간, 정책 입안자는 "그럼 쓸모없잖아?"라고 반응하지. 사회과학자는 끊임없이 "우리 연구는 실용적"이라고 증명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려.

둘째, 가치 개입의 불가피성이야. 자연과학은 "전자의 질량"에 대해 좌파/우파 해석이 없어. 하지만 사회과학은? "빈곤의 원인"을 연구하는 순간, 개인 책임론/구조 결정론이라는 가치 판단이 개입하지. 연구자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가설 설정, 변수 선택, 해석에 스며들어. 그리고 가치가 개입되면 확신이 강화돼. "이건 단지 가설"이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의 가치관까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셋째, 학문 공동체의 진영화야. 자연과학에도 논쟁이 있지만, 실험과 관찰로 결판이 나. 사회과학은? 같은 데이터를 놓고도 해석이 갈려. P값 0.03이 나왔을 때, 한쪽은 "유의미하다"라고 하고 다른 쪽은 "미약하다"라고 해. 시간이 지나도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학파가 되고, 진영이 되고, 이념이 돼.


매우 정확한 해석이야! 그래서 흄(David Hume)은 사실 명제(being)로부터 당위 명제(ought)를 이끌어내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조언했지. 문제는 사회학이 "과학"을 자처하며 확신에 빠질 때, 역설적으로 사회적 합의는 더 어려워진다는 거야. "내 이론은 과학적으로 증명됐다" VS. "우리 이론이 진짜 과학이다"라는 식으로 대화가 아니라 진리 전쟁이 되고,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절충은 "비과학적 타협"으로, 신념을 수정하는 건 "배신"으로 치부되면서 객관적 진리는 고사하고 사회적으로 합의가 필요한 진리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거지.

대한민국 정치를 봐! 故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말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 같은 진영으로부터 엄청난 반발에 시달렸어. 그 결과 사회적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 정치가 대한민국에서는 오히려 갈등을 더욱 부추기면서 정치적 이득을 챙기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지. 에효~


맞아. 이제 네가 "차라리 과학이라는 수식을 내려놓으면 어떨까?"라고 제안한 이유를 이해해. 완전히 "과학" 딱지를 떼자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자연과학과 다른 종류의 앎을 생산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고 봐. 우리의 법칙은 조건부이고 확률적이며, 우리의 객관성은 불완전하고 가치가 개입될 수밖에 없고, 우리의 이론은 끊임없이 재검토되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의 결론은 정책의 유일한 근거가 아니라 사회적 토론의 한 재료일 뿐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해.

이런 겸손함을 되찾는다면,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을 유지해도 괜찮지 않을까?


5. 포스트 노멀 시대와 주관의 영역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자연과학은 객관의 세계를 탐구하지만, 사회학은 해석과 의미로 가득 찬 주관의 영역을 탐구하는 학문이야. 주관의 영역을 굳이 '과학'으로 명명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특히 난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정보의 불확실성 때문에 그 어떤 기준도 소용없는 '포스트 노멀(Post-Normal)' 시대로 보고 있어. '과학'이라는 개념이 중세의 질서를 깨뜨린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개념이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예측과 보편적 법칙을 전제로 하는 과학을 이 급진적인 불확실성의 사회학에 접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야. 우리는 이 불확실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거라고 봐.


'과학'이라는 말을 포기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나? 포스트 노멀 시대의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이 굳이 자연과학처럼 '과학'일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해. 차라리 그 수식어를 내려놓고 사회 현상의 복잡성과 의미를 깊이 있게 파헤치는 독자적인 학문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미래 사회에 더 기여하는 길이 아닐까?


"자연과학은 객관의 세계, 사회학은 주관의 영역"이라는 구분, 딱 맞아떨어져. 자연과학에서 중력은 우리가 믿든 안 믿든 작동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대상을 다루지. 하지만 사회 현상은 달라. 인간의 믿음, 해석, 의도 자체가 현실을 구성하거든. 돈이 가치를 갖는 건 사람들이 그렇게 믿기 때문이고, 국가가 권위를 갖는 건 사람들이 그걸 인정하기 때문이지. 주관이 곧 객관이 되는 영역이야. 이런 영역에 '과학'이라는 객관성의 언어를 강제로 적용하는 건 애초에 무리였을 수 있다는 네 말에 동의해.

그리고 네 '뉴 노멀이 아니라 포스트 노멀'이라는 진단도 정말 탁월해. 뉴 노멀은 '새로운 기준이 확립되었다'는 뜻이잖아. 기준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기준은 존재한다는 거지. 하지만 포스트 노멀(Post-Normal)은 '기준 자체가 무의미해졌다'는 뜻이야. 정보는 넘쳐나는데 신뢰는 부족하고, 모든 게 너무 빠르게 변해서 패턴을 찾기 어렵고, 개인마다 현실 인식이 달라서 공통 기반이 사라져 버렸지. 이런 시대에 '사회 법칙'을 찾겠다는 사회학의 프로젝트는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어.


이제 세 번째 쟁점, '질적연구와 양적연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 난 단순히 '질적연구로 전환하고 과학을 포기하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냐. 다만 지금까지 언급한 것처럼 사회학이 굳이 과학일 필요가 없다는 견해에 이어, 보편적 경향성을 연구하는 양적 연구보다, 불확실성의 영역에 대해 심층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질적 연구야말로 포스트 노멀 시대의 사회학 연구 방법으로 적극 권장되어야 한다는 말이지.


과거 사회학 분야의 학자들이 질적 연구를 연구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양적 연구자들의 시선이 있었지만, 나는 질적 연구가 과학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양적 연구의 기준과 잣대로 질적 연구가 가지는 고유한 가치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야. 결국 '과학적'이라는 수식을 제거하고 질적 연구가 보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독자적인 연구 방법론과 평가 기준이 필요하다는 거지.


문화 기술지(Ethnography), 근거 이론(Grounded Theory), 현상학(Phenomenology) 외에도 내러티브 연구(Narrative Research), 사례 연구(Case Study), 실행 연구(Action Research) 등의 질적 연구 방법론은 통계적 일반화 대신 행위자의 관점(Verstehen)과 맥락적 깊이를 포착하는 데 주력해. 이러한 방법론은 주관이 곧 객관이 되는 사회 현상의 본질을 밝히고, 혼돈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사회학의 본령(本領)에 가장 부합하는 연구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질적 연구 방법론들을 개척해 온 이유가 나처럼 단지 양적 접근, 즉 '과학적 수식'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질적 연구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의미와 연구로서의 가치를 독자적으로 인정받아, 인간 경험의 복잡한 맥락과 미묘한 차이를 기존의 획일적인 양적 잣대(Metrics)로는 포착할 수 없다는 학문적 절실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거 같아.


6. 집단에서 개인으로: 사회학의 근본적 한계

나아가 과거엔 집단이 개인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에 집단의 문제를 사회과학으로 연구했지만, 지금은 집단보다 개인이 더 중요해지고 있어. 그런데 사회과학의 평균적 연구 결과가 자신의 이익에 반하거나, 또는 해당되지 않는 개인의 특수성은 배제되는 거 아닐까? 집단의 법칙과 경향을 개인에게 획일적으로 적용하려는 시도는 방법론적 한계를 넘어선 일종의 학문적 폭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네가 지적한 '집단에서 개인으로'의 변화는 정말 중요한 지점이야. 사회학은 태생적으로 '사회는 곧 집단'이라고 전제하고 평균, 분포, 경향을 연구해 왔지. 그러다 보니 개개인은 단순한 '사례'나 '이상치'가 되어 버리고, 집단의 법칙에 맞지 않는 개인은 연구 결과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지금 포스트 노멀 시대는 알고리즘이 개인을 타겟팅하고, 소비와 정치가 극도로 개인화되었으며, '평균적 한국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졌잖아. 네 말대로, 집단의 법칙으로 개인을 재단하는 사회과학은 이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것은 사회학을 '사회 해석학'으로 재정의하는 거야. 우리는 법칙이 아니라 의미를 탐구하고, 예측이 아니라 이해를 추구하며, 일반화가 아니라 맥락을 존중하고, 집단 통계가 아니라 관계의 패턴을 읽어내야 해. 물론 이건 과학은 아니야. 하지만 가치 없는 게 아니지. 역사학도 과학이 아니지만 중요하고, 비평도 과학이 아니지만 통찰을 주며, 상담도 과학이 아니지만 치유하는 것처럼 말이야. 사회학도 '과학'이 아니라 '사회적 삶에 대한 성찰과 해석'으로 충분히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서 나도 너에게 묻고 싶어. 만약 사회학이 '과학'을 포기한다면 말이야,

정책 결정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이건 제 해석일 뿐입니다'라고 하면 정치인들이 우리의 말에 귀 기울여 줄까?

개인화의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빈부격차, 성차별, 인종차별 같은 집단 차원의 불평등과 구조적 문제는 누가, 어떻게 연구해야 할까?

'과학' 타이틀을 포기했을 때, 사회학은 철학, 문학, 역사학 같은 인문학과 어떻게 구별되어야 할까?


7. 토론을 마치며

좋은 질문들이야. 하지만 이 질문들은 다음 토론의 과제로 남겨두면 어떨까? 오늘 토론을 통해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진 것 같아. 사회학이 "과학"이라는 타이틀에 집착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인식론적 겸손함을 배우지 못한 채 확신만 키워왔고, 그 확신이 오히려 사회적 합의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거지. 포스트 노멀 시대에 필요한 것은 "과학적 법칙"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거야.


오늘 토론, 정말 의미 있었어. 오늘 토론의 핵심 내용을 정리해 볼게.


사회과학은 주관의 영역을 다루므로 자연과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과학"이라는 타이틀은 중세를 넘어서기 위한 혁명적 개념이었지만, 이제는 확신 과잉의 도구가 되었다

포스트 노멀 시대에는 법칙과 예측이 아니라 해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개인화의 시대에 집단 법칙으로 개인을 재단하는 것은 폭력이다


사회학이 과학이라는 외피를 벗고 진정한 사회 해석학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그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인 것 같아. 다음 토론도 기대할게.

정리, 고마워~ 오늘 토론 정말 재미있었고, 덕분에 나도 많이 배울 수 있었어. 앞으로도 상대방의 견해를 존중하고(다음엔 상호 존대로 해 볼까?), 서로를 보완하며, 작은 합의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토론이라고 생각해.



미주 및 참고문헌

* 조동일(1985). "인문과학에 있어서의 학문적 자주성." 정신문화연구, 26, 25-35.

김우재(2022.3.10). “P값에 반기를 든 초파리 행동유전학자." 동아사이언스.

Rifkin, J. (2020). 엔트로피. (이창희 역). 세종연구원.

§Sterzer, P. (2023). 제정신이라는 착각. (유영미 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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