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글처럼 당당히 즐겁게 살랍니다
실리콘밸리 여기저기에서 다시 정리해고 바람이 불면서 또다시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주춤했던 큰 회사들도 다시금 슬슬 작게라도 해고를 감행하는 것 같다. 지난주에 매니저와 1-1 면담을 하는데, 나에게 요즘 “티켓 점수가 좀 낮은데?”라고 한마디 하더라.
엔지니어는 일을 할 때 "티켓"이라고 해서 하나씩 일이 적힌 티켓을 맡는다. 그 티켓 안에는 해야 할 일들, 주의해야 할 점, 이 일과 연관된 일, 또 일의 “점수”가 정해져 있다. 이런 티켓들이 모여서 하나의 프로젝트 또는 새 기능이 탄생된다. 그래서 한주 또는 한 분기가 끝나면 엔지니어들이 몇 점의 티켓을 마쳤냐 가 나온다. 티켓마다 점수가 1 - 5점으로 매겨지고, 1점은 하루면 끝나는 일, 5점은 일주일 정도 걸리는 일로 정의한다.
바로 이 점수가 낮다는 말이다. 티켓 점수에 관한 지적을 당해본 적이 없어서 당황했다. 앞으로는 신경 쓰라면서 매니저가 상담을 끝냈다. 우리도 정리해고를 할 건가? 매니저들은 다음에 있을 정리해고를 준비하고 있는 건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물론 나도 나름대로 변명이 있다. 다른 사람들 도와주거나 또는 복잡한 질문에 대답할 때는 티켓 없이 대화로 하니 내가 한 일을 꼭 이런 점수만 가지고 매길 수는 없다. 그리고 회사를 오래 다니니까 이것저것 하는 활동들도 많아서 앱 개발 말고도 참여하는 일도 심심찮게 많다. 그럼 앞으로 이런 일들은 하지 말아야 하나? 다른 사람들 도와줄 때 새 티켓을 열어야 하나?
매니저에게 낮은 점수에 관한 변명을 하다 보니, 치사한 생각도 들고 약간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20분 정도의 상담을 마치고, 화상통화가 끝나자마자 나는 서둘러 내 점수들을 다시 세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앞으로 휴가도 많이 쓸 예정이었고, 11월에는 콘퍼런스도 있고, 마음이 복잡한 오후를 마무리하고 저녁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뒤숭숭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면담 이후로는 매일 저녁 티켓 점수를 세어보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도 하면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다.
갑자기 약간 서러워졌다. 언제 나는 이런 걱정 안 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나? 돈이 많으면 이런 걱정을 안 할 수 있을까? 실력이 정말 좋으면? 정리해고당하고 몇 달 퇴직금 받고 쉬다가 다른 직장으로 가면 되지. 이렇게 말하며 나도 쿨 해지고 싶다.
또 하나의 전쟁이 터지고, 물가는 계속해서 오르고, 여기저기 실리콘밸리 회사들의 좋지 않은 분기 실적들이 발표가 되고, 그런데도 이 동네 월세는 내릴 생각이 없다. 투자해 놓은 주식들은 다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 요즘은 당당해지기가 힘들다. 그래서 내가 가진 티켓 하나의 점수를 2점에서 3점으로 슬쩍 올렸다. 너 댓 줄의 변명과 함께.
인생이 딱 5년 남았다고 하자.
그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까?
내가 요즘처럼 심난할 때 이 질문을 한다. 딱 5년 사는데, 회사는 다니겠는가? 아니겠지. 그럼 뭐 하지? 가족이랑 그냥 맛있는 거 먹고, 여행도 가고, 캠핑도 하고, 하이킹도 하고, 친구들한테 밥 좀 사주고. 5년 안에 우리 개가 죽으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에 아무 걱정 없이 창문 앞 소파에 누워 능청맞게 코를 고는 12살짜리 노년의 비글을 물끄러미 본다(정확히는 퍼글, 퍼그 + 비글).
요즘 들어서 회사를 그만두면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막막해지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여러 가지 일들에 가슴이 벅차다. 사업도 해보고 싶고, 작은 스타트업에 가서 다시 회사가 자라나는 그 맛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은 생각도 든다.
뭐 가만히 생각해 보면 비굴하게 살 필요도 없겠다. 우리 퍼글처럼 당당히 살아도 되지 않나 싶다.
대문사진은 by Mark Rimmel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