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앱 개발자, 환자의 가족. 두 얼굴
파킨슨 때문에 거동을 전혀 못하시는 엄마의 오른쪽 무릎이 지 지난주 금요일 “뚝” 소리를 내고 부러졌다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거동을 못하시는 엄마를 휠체어에 모시고 동네 정형외과를 가니, 의사는 무조건 수술을 하잖다. 수술 날짜를 잡으러 병원 업무실에 들어서니 병원 소장은 난감해한다.
“정형외과 의사의 입장에서야 수술을 하는 게 맞지만..”으로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엄마의 다리를 고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수술이 꼭 필요한가? 등을 의논하다가 수술 대신 한 주 정도 더 지켜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주 후 다시 병원을 찾아 사진을 찍고 의사 상담에 들어갔다. 의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를 죽이려 하는 구만. 이러다간 금방 돌아가시지. 다 자식들이 자초한 일이야.”라고 대뜸 소리를 질렀다.
엄마를 365일 24시간 홀로 돌보는 동생은 이미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나는 의사의 반응을 예견하고 있었다. 의사의 입장에서는 수술을 하자고 권유를 하는데 듣지 않는 환자는 괘씸하기도 하지만 치료도 시간이 지나면 더 복잡해지고 그만큼 위험도 더 따르기 때문이다.
물론 정형외과 의사의 입장에서야 부러진 다리를 고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거동을 전혀 못하는 환자나 그 환자를 관리하는 보호자의 입장에서는 다른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엄마는 지금 현재 밥도 제대로 못 드시는 상황이다. 우리의 목표는 하루 800kcal를 엄마 몸에 쏟아붓는 것이다.
먹고 싸는 것이 중요한 이 시점에 솔직히 부러진 다리 시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의학 지식이 없는 나와 동생은 결정을 내리기 난감할 따름이다. 분야마다 다른 의사를 만나면 그들이 하는 조언도 다 다르다. 본인의 전공에 따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중요점이 달라서 그렇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사의 조언을 들어야 하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난감하다.
엄마가 6년 전 파킨슨 진단을 받으신 이후 뇌 전문의, 소화기 내과, 임상치료, 재활의학, 각종 외/내과에서 여러 의사를 만났다. 이름난 종합, 대학 그리고 동네 병원등 병원도 여럿을 다녔다. 그나마 나는 몇 번 병원을 따라가지도 않았지만 여태껏 단 한 의사도 엄마를 만져보거나 성의 있게 환자를 대하는 이를 솔직히 만나지 못했다.
거의 모든 의사는 컴퓨터에 환자의 상태를 입력하는 것이 바쁘다. 친절하신 간호사님들 때문에 눈물이 난 적이 여러 번 있어도 의사들의 차가운 말투, 힐끗 한번 환자를 보는 정도의 진료 매너에 몇 번 화가 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엄마를 죽이려고 하냐?"는 극단의 말까지 듣고 보니 수술 날짜를 잡고 와서도 울화가 치밀어 그날밤 잠을 설쳤다.
외국에 이십여 년을 살면서 한국에서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갈 때마다 한국의 의료가 참 위대하다고 느낀다. 캐나다, 호주, 미국에서 살면서 느꼈지만 한국의 효율적인 진료 체계나 눈부신 첨단 기기들 그리고 의사들의 의학 지식과 기술은 세계 최고의 수준임은 당연하다.
참고로 미국의 의료사고는 상상을 초월한다. 년간 400,000의 사람들이 의료 사고를 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요즘엔 그나마 '오바마 케어'(정식명은 Affordable Care Act.) 때문에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비싼 보험료 때문에 의료 혜택을 받지 조차 못한다. 그래서 외국에 좀 살아본 한국 교포들 중에는 한국 의료가 그립다고 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의사들의 태도다. 외국에서 오래 산 나에게 한국 의사들은 권위적이고 차갑다. 또 연락을 하기도 어렵고 질문을 할 시간도 많지 않다. 환자들을 생각하고 환자들을 위한 의술을 펼친다는 느낌보다는 '의사이기 때문에 의술을 행한다'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물론 제도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고 고령화에 따른 환자 증가등 복잡한 이유가 있겠지만 환자로서는 의사와의 상담이 참... 어렵다.
미국에서는 크고 작은 일로 병원에 가면 의사는 내 얼굴을 쳐다보고 질문을 여럿 한다. 최소한 컴퓨터로 타이핑을 할 때는 미안하다고 한마디 건네는 경우도 많다. 가끔은 내가 하는 일이나 취미생활을 묻는 이도 있다. 주치의가 있으면 언제든 이메일로 질문을 할 수도 있고 주치의를 믿고 다른 전문의의 의견을 수렴할 수도 있다. 물론 미국 의사들이 다 환자들을 잘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좋은 의료 보험을 가지고 사는 하나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미국의 의사는 의술도 '서비스'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은 생각이고 한정적인 비교다. 한국에도 환자를 살갑게 대하는 의사도 있을 테고 미국에도 환자 얼굴 안 보고 서류정리만 하다가 끝나는 진료 시간도 많을 것이다.
나는 실리콘밸리에서 의사들이 쓰는 앱을 만드는 앱 개발자다.
지난 8년간 의사들의 고통, 고뇌, 외로움 그리고 그들의 과중한 하루 일과를 도와주기 위해 앱을 만들었다. 회사에서는 항상 어떻게 하면 의사들을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의 하루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이 좀 더 환자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의학계의 많은 이들이 번아웃하고 지치고 힘들어할 때 이들을 위해서 조금이나마 힘이 되기를 바래며 상품을 구성했다.
그런데 개발자라는 직함을 놓고 세상을 반 바퀴를 돌아 한국에 오면 나는 의사의 반대 편 의자에 앉은 '환자의 가족'이다. 의사를 맹목적으로 믿고 그들을 위해 나의 하루를 태우고 고민하는 사람으로 살다가 실제로 내가 그들과 마주 앉아 내가 사랑하는 이의 얼마 남지 않은 날들에 대한 고민을 할 때 나는 그들의 차가운 태도에 솔직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어머니를 죽일 작정이냐?
이 한마디를 던질 때 그이는 환자와 환자의 가족을 진정으로 생각했을까? 환자가 의사 본인의 가족이라면? 엄마의 수술을 몇 시간 앞두고 내가 대답할 수 없는 난처한 질문들만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한다. 당연히 의사는 환자를 위해 최고의 결정을 내리겠지? 당연히 의사는 환자의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조언을 하겠지?
엄마는 내일 수술을 위해 하루 일찍 병원에 입원하시고 동생은 6인실 병실에서 밤새 엄마 옆을 지킨다. 나는 그들을 뒤로한 채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청하고 새벽 1시 실리콘밸리 시간에 맞춰서 일을 시작한다.
난 요즘 의사들의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앱을 만드는 중이다. 옆 부서에서 의사들이 환자와 상담 시 녹음한 내용을 챗GPT를 통해서 차트로 옮겨주는 서비스를 만드는 중이다. 잠깐 시간을 내서 그 부서의 화상 회의에도 참여한다. 회의의 시작은 “바쁜 의사들이 환자와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앱을 구상해야 한다”는 서두로 시작한다.
마음속으로 미국에서 일하는 의사들, 한국에서 일하는 의사들 그리고 오늘은 우리 엄마의 수술을 해주는 의사에게도 감사한 마음과 함께 건투를 빈다.
대문은 Photo by Jonathan Borb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