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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CEO 백종일 Apr 05. 2022

에피소드 #1. 나는 가난이 싫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다. 마치 GOD의 노래 '어머님께'에 나오는 노래 첫 가사처럼 말이다. 부모님은 항상 돈 때문에 싸우는 일이 잦았다. 3남매는 집 한구석에 숨죽이고 서서 부모님 눈치를 봐야만 했다. 혹시라도 불똥이 튀는 날에는 괜히 혼나게 되는 일들도 발생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안 환경이 어렵고 넉넉지 못했던 탓에 항상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22살 10월 군대에 가게 되면 돈걱정 없이 지낼 줄 알았다. 그러나 군대에서도 돈이 없으면 남들 눈치를 보게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주말 외출을 보내준다던가 취침 전에 매점을 가야 한다던가 할 때마다 그 시간들이 싫을 때가 많았었다. 모든 게 다 돈이 있어야 해결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무작위 착출로 전경으로 착출 된 것도 억울했는데 전경은 외박도 잦았고 외출이나 외박을 나갈 때 군복(전투복)을 입지 못하게 했었다. 시위 진압을 하는 전투경찰 이미지로 인해서 군복을 입고 사회로 나가면 간혹 해고 지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 가면 옷 걱정 없을 줄 알았는데 옷까지 신경 써야 했다. 



나는 이 당시만 하더라도 청바지를 십몇만원씩 주면서 사는 주변 친구들을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을 때였다. 미친 행동이라고 생각이 들었고 비싼 청바지를 사는데 돈을 주는 부모들도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옷이라고는 변변치 않았던 나는 잦은 외출과 휴가 때 입고 나가는 옷이 매일 똑같은 것이 늘 신경이 쓰였다.



외출을 나가거나 매점을 가는 등 군대에 가게 되면 돈걱정 없이 지낼 줄 알았다. 그러나 군대에서도 돈이 없으면 남들 눈치를 보게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경북 영천과 인천을 오가는 차비만도 10만 원에 육박했고 휴가는 2~3개월에 한 번씩은 나가야만 했다. 휴가 때 왕복으로 내야 하는 차비를 낼 수 없어 휴가를 자진 반납하기도 했다. 우리 집은 매번 휴가 때마다 차비를 줄만큼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다.



나는 그때마다 성공하고 싶었고 잘되고 싶었다. 일과 시간이 끝나고 취침 점호 후에 주어지는 TV 시청시간에 나는 TV를 보지 않았다.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캐비닛에 머리를 처박고 작은 플래시 불빛에 의존해 읽기를 썼다. 라디오를 듣고 자기 계발을 하기 위해 무언가를 무작정 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뭐라도 하고 열심히 해야만 성공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TV를 보지 않는다.



24살 12월 겨울 말년 휴가를 나와 취직할 회사를 알아보고 회사 면접을 봤다. 그리고 전역 바로 다음 날부터 출근을 하게 됐다. 내가 전역 후 시작한 첫 직장은 영업이었다. 당시에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일반 직장을 다녀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능력과 성과에 따라서 지급하는 영업직이야말로 내가 돈을 가장 빠르게 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판촉물 영업을 시작한 25살이었던 나는 젊은 패기와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지고 정말 열심히 영업활동을 했다. 열심히 한만큼 성과가 나오고 돈도 많이 벌게 될 거라 믿었다. 집과 나에게 쌓여있는 빚도 갚고 머지않아 곧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나는 15년 동안을 신용불량자의 삶을 살았다.



'나는 직장인 체질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건 아마도 이대부터 인 것 같다. 직장에 다녀서는 절대로 가난을 벗어날 수 없을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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