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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Aug 05. 2019

더 나은 삶을 위한 그녀의 한심한 취향

2018년 영화 <소공녀, Microhabitat> 리뷰

영화 좀 추천해주실 수 있어요?


많이 듣는 질문이다. 영화 관련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더 많이 듣는다. 그런데 이 질문은 참 이상하다. 영화는 완벽한 '취향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음악으로 바꿔보자. 밑도 끝도 없이 "음악 추천해주세요"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베토벤과 모차르트부터 들으세요" 이런 답을 원하진 않았을 것이다. 책은 어떨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부터 시작하세요" 이것도 이상하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취향의 영역에서는 정확한 답을 주기 어려운 질문이다. 게다가 답을 들은 사람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물어야 할까. 먼저 자신의 취향을 밝혀야 한다. 혹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제가 여자친구와 헤어져서 힘든데 어떤 영화를 보면 좋을까요?" "저는 공포영화가 좋은데, 최근 개봉작 중에 괜찮은 작품이 있나요?" "저는 인간관계가 어려운데, 어떤 책을 추천해요?" "제가 요즘 우울한 상태인데, 어떤 음악을 들으면 마음의 안정에 도움이 될까요?" 등과 같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질문을 해야 원하는 답을 얻어내기 쉽다.
문제는 자신의 취향을 모른다는 점이다. 혹은 그 취향에 확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인이 영화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많이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보다 더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인정해주는 작품을 보려는 경향이 있다. 즉, 자신의 취향을 남에게 묻는 것이다. 결국 첫 질문을 다시 말하면 "제 취향이 뭔가요?"라고 바꿀 수 있다.
영화 '소공녀' 스틸컷
영화 <소공녀>에는 자신의 취향을 명확히 아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가장 질문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주인공과 반대로 자신의 취향을 모르거나 감추고 사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어쩌면 영화 <소공녀>는 취향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미소가 자신의 취향을 완벽히 아는 반면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은 취향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혹은 타인의 취향이 자신의 취향인 양 착각하고 살고 있다. 결국 <소공녀>는 취향을 아는 사람이 취향 없이 사는 사람들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미소(이솜 분)는 3년 차 가사도우미다. 위스키,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만 있다면 더 이상 자신의 삶에서 바라는 것이 없다. 새해에 담배와 위스키 가격이 오르자 고민 끝에 집을 포기한다. 지낼 곳이 없어진 미소는 대학시절 밴드를 함께 했던 멤버들을 찾아간다.

영화 <소공녀>는 요즘 가장 핫한 독립영화 제작사인 ‘광화문시네마’의 네 번째 작품이다. 전고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제39회 청룡영화상, 제54회 백상예술대상, 제55회 대종상영화제, 제3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 수많은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담배, 위스키, 한솔이 너만 있으면 돼


미소는 취향이 있다.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세 가지뿐이다. 월세와 담배값, 위스키 값이 오르자 미소는 "어쩔 수 없어요"라며 오랜 고민 없이 집을 포기한다. 이후 대학시절 밴드 활동을 함께한 사람들을 하나씩 만나러 가는데, 이들은 미소와 달리 모두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잠잘 곳이 있지만 자신만의 취향이 없거나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


먼저 베이스 치던 문영은 기업의 규모가 자신의 정체성이고, 키보드 현정은 시부모와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개인의 삶을 버렸다. 드럼 대용은 아내의 소망인 아파트를 샀지만 이혼으로 빚과 상처만 남은 상태다. 보컬 록이는 부모를 위한 결혼만이 인생 마지막 목표인 것처럼 행동한다. 기타 치던 정미는 부잣집에 시집왔지만 남편 비위 맞추기 급급하고 "육아가 고난"이라고 본인도 모르게 말한다. 모두 타인을 위해 살고 있고, 본인의 취향이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취향이 확실한 사람과 없는 사람의 만남은 묘한 마찰음을 낸다. 미소의 취향이 주는 이질감은 영화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아도 긴장감을 유발한다. 밴드 활동이라는 연결고리로 다시 만나는 이들은 과거에 동일한 취향으로 모였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미소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의 취향을 포기하거나 감추고 지내는 상태다. 다시 말하면 미소가 만난 사람들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취향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이다.


그중 또 다른 사람이 있다. 바로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안재홍 분)이다. 그는 이제 취향을 버리려는 사람이다. 영화는 중반부까지 취향을 이미 버린 사람들을 보여주다가 후반부에는 이들이 취향을 왜 버리게 되었는지 한솔을 통해 변명한다. 한솔은 웹툰 작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공장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다. 그는 미소가 남자들의 집까지 드나들며 잘 곳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지만, "너한테 항상 미안해"라며 막을 방법이 없는 자신의 능력과 상황에 좌절한다. 그리고 중동 지역 발령을 자원해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사람답게 사는 게 뭔데?


한솔의 선언은 미소의 평정심을 무너뜨렸다. 노숙을 하고 상가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아도 끄떡없던 미소는 한솔의 말에 무너진다. 한솔은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어서, 남들 다 하는 것 해보고 싶어서"라고 이유를 댄다. 미소는 답답하다. "사람답게 사는 게 뭔데? 나는 이대로가 좋은데"라며 "나는 담배, 위스키, 한솔이 너. 이게 내 유일한 안식처야. 근데 네가 없으면 어떡하라고"라고 화를 낸다. 밴드부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를 담담히 들어주던 미소의 분노는 어딘가 서글프다. 집까지 버렸건만, 그 사소한 취향마저도 지킬 수 없다니.


나는 네가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술, 담배라는 것도 정말 한심하고


부잣집에 시집간 정미는 그 취향에 대해 잔인하게 말했다. 미소가 자신의 집에서 지내면서 술, 담배를 계속하는 모습이 한심하고, 그걸 이해해주기까지 바라는 건 염치없는 일이라고 날을 세웠다. 그러면서 "남이 우리 집에 오래 있으면 신경 쓰이는 법이지. 그걸 왜 모르니"라고 쏘아붙였다. 미소는 미안해하면서도 "나는 아니니까, 나는 아무리 좁은 방에 친구들이 와서 자도 반갑고 좋으니까"라고 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대화는 관객들을 불편하게 한다. 미소에게 감정 이입하던 관객들이 그 순간 정미의 말에 더 공감하기 때문이다.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누군가는 미소의 행동이 한심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한심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상하게도 이 질문에 우리는 대답하지 못한다. 자신의 취향을 버리고 타인의 취향에 맞춰 사는 나머지 사람들은 정상적인가.


영화 <소공녀>의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미소서식지)다. 미소생물이 서식하는 특유의 다양한 환경 조건을 갖춘 장소를 말한다. 제작사 측은 주인공 이름인 ‘미소’는 여기서 따왔다고 전했다. 미소라는 인물이 자기만의 서식지를 찾아다니고 자기만의 서식 방법이 있는 생명체라고 봤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모순적으로 자신만의 서식지에서 사는 사람은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이라는 미소뿐이다.


왜 우리는 미소처럼 살지 못할까. 가장 큰 이유는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취향만을 고집하며 살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선 내 것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과 마주치게 된다. 영화 <소공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미소가 아니라 미소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있다. 취향을 모르거나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을 비추며 "이중에 한 명이 당신이야"라고 지적한다.


미소는 완벽한 이상향의 인간


그런 점에서 미소는 일종의 판타지다. 전고운 감독은 미소에 대해 "완벽한 이상향의 인간"이라고 설명했다. 돈만 없지 인간적으론 완벽한 사람이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때문에 어떤 이는 미소의 행동이 현실도피라고 비난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미친 듯이 공부하여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등 안정적 직장을 원하고, 중년들은 목숨 걸고 노동하여 자녀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죽도록 노력해서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와중에 취향을 지킨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사치일지도 모른다.

당장 우리에겐 어려울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취향이 있다면 미소를 응원할 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취향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추구할 용기를 내야 한다. 내 취향을 추구한다는 것은 살아가는 원동력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취향을 추구하는 데 큰 응원이 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취향을 고집하는 것 역시 먹고살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우리는 포기하는 일이 너무 익숙해졌을 뿐이다.


영화 <소공녀>는 성장영화가 아니다. 결말에 가면 그 누구도 변하지 않는다. 미소를 만난 이들은 마치 꿈꾼 것처럼 미소를 추억한다. 록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이들은 미소를 찾으며 "나아지면 연락하겠지"라고 말한다. 그들의 태도에서 누구도 미소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고 있음이 느껴진다.


도대체 무엇이 '나은 삶'인가. 그럼에도 미소는 끝까지 자신의 취향을 변함없이 지킨다. 백발이 되더라도 취향을 지키는 모습 조금은 극단적으로도 느껴진다. 이쯤되면 영화를 보는 우리는 불편해진다. 관객 스스로 정상적 삶이라고 생각한 지점에 흠을 내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면 등장인물 중 누구도 정상, 혹은 비정상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다. 백발이 된 미소의 뒷모습에 그저 그녀의 목소리만 한 번 더 떠오를 뿐이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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