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영화 <우리집>, 윤가은 감독 작품
우리집은 20년 동안 변함없었다. 산꼭대기에 있는 갈색 벽돌로 지어진 작은 빌라였다. 20년 동안 이곳을 ‘우리집’이라 불렀다. 덕분에 스무 살까지 '우리집'이라는 말에 혼동은 없었다. 문제는 군 전역 후 일어났다. 돌아오니 아버지, 어머니, 누나 모두 모여 살지 않았다. 흩어져 살게 된 우리 가족을 자주 보고 싶은 마음에 이 시기부터 이틀씩, 삼일씩 집을 옮겨 다니며 지냈다. 이러한 상황은 어느 집도 '우리집’이라 부르기 어렵게 했다.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이 '우리집'인가.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인가. 부모님 명의로 된 집이어야 '우리집'인가. 잠을 하루라도 더 자는 곳이 '우리집'인가.
'우리집'은 어디일까. 아니, 무엇일까. 영화 <우리집>은 어린아이들을 통해 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부모님이 헤어질까 걱정하는 아이와 경제적인 문제로 이사를 자주 하는 아이들이 각자의 '우리집'을 지키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언제나 그렇지만 아이들의 순수함은 어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가. 이 아이들의 끔찍한 '우리집' 사랑은 그저 거주하는 공간, 잠자리 정도로만 집을 생각하는 어른들의 '우리집'을 보기 좋게 부순다.
초등학생 하나(김나연 분)는 가족여행을 가는 게 소원이다. 매일 싸우는 부모님도 여행을 다녀오면 사이가 좋아질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은 바쁘고 오빠는 짜증만 낸다. 우연히 어린 동네 친구 유미(김시아 분), 유진(주예림 분) 자매를 만난 하나는 이들이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풀리지 않는 '가족'에 대한 고민을 터놓으며 단짝이 된 세 사람은 무엇보다 소중한 각자의 '우리집'을 지키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다.
가장 신경 쓴 것은 카메라의 시선
영화 <우리집>은 2016년 영화 <우리들>로 영화판을 들썩이게 한 윤가은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전작에 이어 또다시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윤 감독은 아이의 시선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대본을 주지 않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유도한다. 예를 들면, 아역 배우에게 '엄마, 아빠가 싸울 때 어떤 기분이 들어'라고 묻고 그때 감정과 말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한다. 윤 감독은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어린이 배우와 신체 접촉을 주의 해달라거나 언어 사용과 행동을 신경 써달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어린이 배우들과 함께 하는 성인 분들께 드리는 당부의 말' 9가지의 촬영 수칙을 만들어 촬영 현장에 문서로 비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윤 감독이 이토록 배려하며 연출한 이유는 영화 <우리집>이 아이들의 시선에 대한 영화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아이들의 시선에 따라 움직인다. 아이들의 감정적 변화는 카메라 움직임과 프레임으로 대변된다. 아이들의 눈높이(Eye level)에 맞춰 카메라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 핸드헬드로 찍어 흔들리는 카메라는 아이들 심리상태에 맞춰 변해간다. 윤 감독은 "조금이라도 위에서 아래로 찍으면 아이들이 대상화돼 보였다"며 이 같은 카메라 워크를 선택했다.
첫 장면은 전작과 닮아있다. <우리들>이 피구를 하기 위해 모여있는 친구들을 지켜보는 선이(최수인 분)의 불안한 시선으로 시작하며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우리집>은 가족들의 다툼을 들으면서도 애써 괜찮은 척하며 밥상을 차리는 하나(김나연 분)의 시선을 통해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선이의 친구들, 하나의 부모는 무언가 말하고 있지만 프레임 바깥에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관계의 단절과 불안한 주인공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카메라 구도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아이의 감정에 집중하겠다는 선언 같은 장면이다.
프레임 안팎에서의 인물 움직임도 아이들의 심리와 가족관계를 대변한다. 부모들은 주인공 하나의 시선, 즉 카메라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는 부모의 프레임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가 말을 건다. 가족여행을 가자며 엄마, 아빠, 오빠에게 말 거는 장면은 모두 유사하다. 앉아있는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의 프레임 안으로 하나가 들어가는 방식이다. 이는 하나가 각자의 프레임 속에 사는 가족들을 하나로 엮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이들의 관계가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집도 진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유미의 고민을 들은 하나는 자신 역시 답답하다며 이같이 말한다. 하나는 매번 싸우는 부모가 헤어질까 두렵고 유미 자매는 또다시 이사를 갈까 불안하다. 아이들에게 '우리집'은 불안한 존재이자 지켜야 하는 절대가치를 지닌 곳이다. 윤가은 감독은 "아이들을 보면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난생처음 겪는 거니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고 그 과정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다"며 "그렇지만 표현하고 싶은 감정은 있다. 그게 사라지지 않고 제 안에 남아 영화를 통해 꺼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의 감정과 함께 눈여겨볼 것은 '계란'이다. 계란은 여러 형태로 수차례 등장한다. 먼저 오므라이스는 하나는 유미, 유진 자매의 집에 찾아가 해준 요리다. 세 아이들이 가장 밝은 순간이 바로 이 오므라이스를 먹을 때다. 오므라이스에 올라가는 오믈렛은 몇 개의 계란을 흰자, 노른자 구분 없이 뒤섞고 얇게 부쳐 만드는 것이다. 이는 서로의 결핍을 공감하며 마치 원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관계를 맺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상징한다. 또, 가족여행 전날 하나가 샌드위치를 만들 때는 스크램블 에그가 등장한다. 샌드위치 속에 넣을 이 계란은 끝내 떠나지 못한 여행처럼 완성되지 못한다.
계란을 둘러싸고 있던 계란판도 등장한다. 아이들은 종이 계란판으로 집을 만든다. 이는 일종의 이상향이다. 결핍한 아이들이 자신들이 꿈꾸는 '우리집'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다. 유진이는 이 집을 멀리서 일하는 부모님께 자랑하기 위해 들고 나선다. 그러나 아이들은 길을 잃고 유미 부모님이 계신 곳에 도착하지 못한다. 하나와 유미는 서로를 탓하며 화를 내다가 계란판 집을 발로 부순다. 꿈꾸는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 것이다.
이처럼 변주하는 계란의 형태는 곧 가족을 의미한다. 영화 <우리집>은 계란판으로 상징되는 '집'이라는 껍데기를 부수고 '우리'를 발견하는 이야기다. 껍데기를 부수고 집에 돌아온 하나가 가족들을 위해 밥 위에 얹은 계란 프라이로 이 이야기는 완성된다. 아울러 유미가 말하는 '우리집'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유미는 하나와 헤어지며 "계속 우리 언니 해줄 거지?"라고 묻는다. 이는 하나의 '우리집'이 단순히 가족이 함께 지내는 것을 넘어 외부와의 관계를 맺는 매개체 역할까지 확장됨을 보여준다.
똑똑하고 특출난 아이들의 능력을 과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주 평범한 아이들이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를 외부로 분출하는 이야기다. 어른의 시선으로 보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종이로 된 계란판으로 집을 만드는 것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그 집이 아니라 그 집을 만든 아이들의 마음이다. 아이들의 문제 해결 능력이 아니라 아이들이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려는 의지와 소망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의 대사처럼 말이다.
이번엔 진짜로 헤어지실지도 몰라.
그런데 내가 안 헤어지게 할 거야
다시 첫 문단으로 돌아가자. '우리집'은 무엇인가. 스무 살까지 우리집은 산꼭대기에 위치한 갈색 벽돌로 만들어진 작은 빌라였다. 이후 가족들은 흩어졌고 일정 기간 동안 '우리집'은 없었다. '집'은 있지만 '우리'라고 부를 수 없었던 탓이다. 모순적이게도 영화에서 해변가에 우연히 발견한 텐트에 누워 "여기가 우리집이었으면 좋겠다"는 유미의 말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가장 형편없는 형태의 집이 우리집이길 바라는 마음이라니. 영화 초반 하나와 유미의 '우리집'은 달랐다. 하지만 계란판 집을 부수고 텐트에 누운 아이들의 '우리집'은 같은 의미가 됐다.
돌아온 하나는 가족을 위해 계란프라이를 한다. 이 계란프라이를 보며 가족 모두 식탁에 앉는 장면은 마음을 울린다. 결국 하나에게 '우리집'은 형태가 아닌 그저 같은 프레임 안에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아닌가. 하나와 유미의 '우리집'이 엔딩 크레디트이 올라간 후 어떻게 될지 관객들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의 마음은 알 수 있다. 하나는 여전히 가족들을 위해 계란 요리를 하고 있을 테니까. 우리집 때문에 불안해하는 관객이 있다면 하나는 유미에게 했듯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뭐든 하다 보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