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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Dec 22. 2019

모순적인 결혼, 충돌하는 이혼

넷플릭스 영화 <결혼 이야기> 리뷰(해석, 결말)

 스포일러 주의

부모님은 자주 싸우셨다. 어린 시절이라 싸우는 상황이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 대하듯 싸우고 다음날 아침밥을 함께 먹는 모습은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 흉을 봤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 어머니에게 "맞아, 아빠 참 나빴어"라고 맞장구를 쳐줬다. 어머니는 "그래도 너네 아빠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냐"라며 되려 꾸짖었다. 당신은 욕해도 되고 아들은 안되나 보다. "그렇게 싫으면 아빠랑 이혼해" 아주 순수하고 어린 마음으로 내뱉은 말에 어머니는 "그게 또 그런 게 아니야"라고 모호하고 모순적으로 답했다.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됐다. 그저 부모였던 두 사람이 과거에 지독히 서로를 사랑했던 남자와 여자였다는 사실을. 모호하고 모순적인 어머니 발언의 실마리를 여기서 찾았다. 결혼이란 게 모순으로 가득 차 있어 '그게 또 그런 게 아닌' 것이다. 2019년 11월 개봉한 노아 바움백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결혼 이야기>는 이 같은 현실의 민낯을 그대로 노출한다. 복잡하게 얽힌 한 부부의 이야기의 모순적인 상황과 태도를 반복하여 보여준다. 한 부부가 이혼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이 '이혼 이야기'가 아닌 '결혼 이야기'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넷플릭스 영화 <결혼이야기> 스틸컷
LA에서 잘 나가던 배우 니콜(스칼렛 요한슨 분)은 연극 연출가 찰리(아담 드라이버 분)와 결혼하면서 뉴욕에서 10년째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아이도 낳고 찰리의 극단에서 연출가와 배우로 함께 성장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니콜은 이제 LA로 돌아가고 싶다. 찰리에게 말했지만 뉴욕 브로드웨이에 입성하는 게 꿈인 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결혼 이야기>를 연출한 노아 바움백 감독은 가족과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해왔다. <오징어와 고래><마고 앳 더 웨딩><위아영><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등을 통해 말이다. 특히 <오징어와 고래>는 부부의 이혼을 자녀의 시점으로 다루는데, <결혼 이야기>에 이르러 자신의 이야기를 확장했음을 보여준다.


<결혼 이야기>는 고전영화 비율인 1.66대 1을 사용한다. 최근 개봉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1.85:1(플랫) 비율과 2.35:1(와이드 스크린) 비율인 것과 달리 좁은 화면이다. 많은 유럽 영화들이 여전히 이 비율을 고집하고 있는데, 배경보다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다. 감독은 이 비율을 활용해 클로즈업 장면을 다수 배치하여 관객들이 캐릭터들의 정서에 더 쉽게 몰입할 수 있는 효과를 냈다. 초반부 지하철 귀가 장면과 후반부 말싸움 장면에서는 화면 양쪽 끝에 두 사람을 세운 채 풀샷으로 보여주면서 정서적 거리를 나타내기도 했다.

“니콜은 선물을 잘 고른다. 잘 놀아 주는 엄마다. 춤을 잘 춘다. 팔 힘이 좋아서 병뚜껑도 잘 따는데 얼마나 섹시한 지 모른다. 수동차 운전도 잘한다. LA스타가 될 수 있었는데 다 포기하고 나랑 뉴욕에서 연극을 했다”


“찰리는 뭐든 혼자 잘한다. 굉장히 깔끔해서 정리정돈은 믿고 맡긴다. 양발 깁기, 요리, 셔츠 다림질도 뚝딱이다. 내 감정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져 주거나 폭발했다고 자괴감을 주지 않는다. 자수성가했다. 옷을 잘 입는다. 누군가 이빨에 음식이 끼거나 얼굴에 묻으면 상대방이 민망하지 않게 알려준다”


첫 장면은 달달하다. 니콜과 찰리가 생각하는 서로의 장점을 이야기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마치 두 사람의 뜨거운 사랑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것처럼 보이지만, 10분도 채 되기 전에 이 같은 예상은 빗나간다. 이 말들이 이혼 조정관 앞에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바로 다음 장면에서 보여준다. 니콜은 끝내 찰리의 장점을 쓴 글을 읽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를 뜬다. 거창한 설명 없이 두 사람이 사랑했던 사이였으며, 이제 막 이혼 절차에 돌입했음을 짧은 장면과 대사만으로 알려준다.


영화 <결혼 이야기>는 큰 틀에서 보자면 '이혼 이야기'다. 니콜과 찰리가 이혼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공연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장면은 두 사람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니콜과 찰리는 이혼 조정기간이지만, 여전히 공연을 함께 하고 있다. 아울러 집에도 함께 간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같이 탔지만 니콜은 앉아 있고 찰리는 서 있다. 서로 이별하기로 의견을 모았지만 이혼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는 함께 가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담겨있는 장면이다.

날 독립적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찰리와 니콜은 왜 이혼할까. 니콜은 이혼 전문 변호사 노라(로라 던 분)를 만나 결혼생활에 대한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대화가 섹스보다 좋았죠. 근데 섹스도 대화 같았어요"라며 찰리와의 연애부터 회상한다. 그러면서 결혼 후 자신의 심경 변화에 대해 언급한다. 출산 후 우울감을 이야기하고 "내 취향도 잊어버릴 지경"이라며 자존감이 떨어졌다고 고백한다. 이때 새로운 작품 제의가 들어오면서 "생명줄이 나타난 기분"이었지만 찰리의 냉담한 반응에 "그는 날 인정하지 않았어요. 자기와 별개인 독립적 인격체로요. 그래서 내 핸드폰 번호를 물었는데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떠났죠"라고 이별의 이유를 전한다.


니콜이 노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 장면은 <결혼 이야기>에서 가장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노라의 추임새를 제외하면 온전히 니콜의 대사로만 이루어진 장면이다. 니콜은 소파에 앉아 시작해 잠시 일어나 코를 풀고,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와 다시 소파로 돌아오면서까지 멈추지 않고 긴 대사를 내뱉는다. 매우 연극적인 이 장면은 리듬감이 넘치고 대사 한 마디마다 감정이 충실히 실려있어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니콜 역의 스칼렛 요한슨이 여우주연상을 받는다면 이 장면의 공이 클 것이다.

찰리가 무대감독이랑
잔 것 같아요


찰리는 바람을 피웠다. 니콜은 변호사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이는 '혼외정사'라는 표현으로 법정에서 칼이 되었다. 변호사들은 두 사람의 단점만 모아 공격했다. 니콜의 변호사는 찰리를 향해 "보잘것없는 연극"을 하고 있다며 니콜은 그 연극을 위해 인생을 희생한 것이라 말한다. 찰리의 변호사는 니콜에게 "아들을 인질 삼아 찰리의 돈을 뜯으려 한다"라면서 "밤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며 엄마 자격이 없다고 공격한다. 찰리의 외도 이야기가 나오자 "니콜이 찰리의 컴퓨터를 해킹하고 이메일을 보고 알게 된 것"이라며 "정말이라면 중범죄다"라고 반박한다. 그야말로 진흙탕이다.


모순적이게도 진흙탕인 싸움터를 벗어나면 서로를 챙긴다. 재판 전 미팅룸에서 서로를 향해 공격을 서슴지 않던 변호사들은 갑자기 점심을 먹을 시간이라며 합의를 한다. 점심메뉴를 고민하는 찰리를 보고 니콜은 그의 취향에 맞춰서 음식을 대신 주문한다. 전기가 나갔다는 니콜의 호출에 찰리는 불평불만 없이 수리한다. 이 같은 장면은 전쟁영화 장 르누아르 감독의 <위대한 환상>(1937)을 떠오르게 한다. 프랑스가 독일을 공격하고 있는 전시 상황에 독일군은 프랑스군을 초청해 오찬을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영화 초반 그려진다. 노아 바움백 감독은 <위대한 환상>을 언급하며 "그런 전쟁의 인간적인 면이 이혼과도 비슷한 거 같다. 낮에는 중재하거나 법원에서 대리인을 통해 상대를 모욕하다가도 집에 돌아가서는 함께 아이의 숙제를 봐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감독의 발언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노아 바움백 감독은 배우 제니퍼 제이슨 리와 2013년 이혼했다. 이후 그는 함께 영화를 만든 배우 그레타 거윅과 열애를 시작했는데 이혼 전부터 만난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휩싸인 바 있다. <결혼 이야기>는 자신을 둘러싼 의혹들에 대한 감독의 대답처럼 보인다. 스스로를 대변하는 영화였기 때문일까. 이혼이라는 파도에 휩싸인 남녀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면서 자신의 커리어 중 최고의 영화를 만들어버렸다. 또한 연기 경력 20년이 넘는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대표작을 하나 추가해주었다.


감독은 <결혼 이야기>를 통해 이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독백 장면에서 니콜은 자신이 찰리를 떠나게 된 이유라며 장황하게 첫 만남부터 결혼생활까지 털어놓지만, 말 끝에 "찰리가 무대 감독과 잔 것 같다"라고 가볍게 내뱉는다. 사실 그 한마디가 직접적인 이혼의 이유일 수도 있다. 찰리가 LA로 떠난 니콜이 이혼 소송을 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도 어쩌면 이유가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는 니콜이 그저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 여긴다. 두 사람은 법정 다툼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진짜 이혼 사유를 마주하게 된다.

난 매일 눈뜰 때마다
당신이 죽길 바라!


영화 후반부 '말싸움 장면'은 두 사람이 진짜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앞서 이야기한 니콜의 독백 장면과 함께 최고의 장면을 하나 더 꼽으라면 이것이다. 이 장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두 사람은 자신들이 닥친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폭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니콜은 찰리의 외도를 언급하며 "당신이랑 섹스한다고 생각하면 피부를 벗겨내고 싶어"라고 말하고, 찰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언급하며 상처를 후벼 파는 니콜에게 "헨리만 괜찮다면 당신이 차에 치여 죽었으면 좋겠어!"라며 울부짖는다.


두 사람이 티키타카처럼 대사를 주고받는 이 장면 역시 니콜의 독백 장면과 마찬가지로 연극적이다. 좁은 장소에서 두 사람이 조금씩 위치를 이동하면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연출되었다. 이와 함께 점진적으로 인물들의 감정과 목소리 톤이 고조되는 것이 결합하여 특유의 리듬을 만들고 영화는 절정에 이른다.

어쩌면 이혼은 사랑을 포장하고 있던 결혼이라는 제도를 벗겨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절차는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전부 책임과 권리로 치환되고 나중에는 돈으로 환산된다. 영화 초반의 서로를 탓하지 않던 두 사람은 법적 절차에 들어서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 문제가 없었던 관계다. 서로의 커리어에 대한 존경이 있었고, 여전히 각자의 능력과 인간적 장점을 인정한다. 부부가 되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만 관계 유지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혼 절차가 끝난 뒤에 다시 영화 초반 모습으로 돌아간 두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혼인 관계는 끝났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시간을 배려하고 신발끈을 묶어줄 수 있는 사이로 남았다. "그냥 이혼해"라는 아들의 말에 "그게 또 그런 게 아니야"라고 말하던 어머니가 생각난 것은 이 때문이다. 포장되어 있던 제도만 벗겨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점은 그땐 알지 못했다.

영화 말미에 찰리가 결혼생활을 다룬 뮤지컬 <컴퍼니>의 'Being Alive'를 열창하는 장면은 묘한 울림을 준다. 이 노래가 찰리의 마음을 적확하게 표현하면서 영화의 주제를 압축하여 보여주기 때문이다. 노래 가사는 독특한 구석이 있는데, 모순적인 문장이 번갈아 이어지며 충돌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날 너무 꼭 아는 사람'에 이어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이 나온다거나, '날 너무 잘 아는 사람' 다음에 '날 마비시키고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아버지 욕을 한참 하다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냐"라고 꾸짖던 어머니가 떠오른 시점이다. 어쩌면 어린 아들에게 어머니가 보여준 모순적 태도는 이 가사처럼 결혼 자체가 가진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혼이 가진 모순이 그 모순을 벗겨내는 이혼 절차와 충돌하면서 니콜과 찰리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아닐까. 이혼 조정 과정에서 상대방의 장점을 쓰라고 했을 때, 니콜은 모순적인 문장을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난 평생 그를 사랑할 거다.
이제 말이 안 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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