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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Nov 24. 2019

악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넷플릭스 영화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 리뷰(실화, 결말, 해석)

※스포일러 주의

어린 시절, 자주 먹던 과자가 있었다. 아마도 봉지 안에 동그란 딱지 때문에 그 과자를 샀을 것이다. 딱지는 보는 각도 따라 안에 그려진 캐릭터가 바뀌는 마술 같은 장난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홀로그램 종이’라고 하더라.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탓에서 지루하지 않고 다른 장난감보다 더 오래 갖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을 이야기할 때 흔히 언급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다의도형(多義圖形, ambiguous figures)'이다. 하나의 도형인데 보는 방법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토끼-오리', 영국 만화가 윌리엄 엘리 힐의 '아내와 시어머니'가 대표적이다. 전자는 오리를 생각하면 오리가 보이고, 토끼를 생각하면 토끼가 보인다. 후자는 젊은 부인이 보이면서, 코와 턱이 큰 노파로 보이기도 한다.
범죄도 비슷하다. ‘홀로그램 종이’, ‘다의도형’처럼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 관점은 범죄의 성격을 결정한다. 사건의 성격은 ‘사이코패스 범죄’, ‘묻지마 범죄’, ‘조현병 범죄’ 등의 이름을 붙이는 언론이 보통 정한다. 하지만 실제 사건을 들여다보면 잘못된 명명인 경우가 많다. 언론이 잘못 조명한 일부 사건은 영화화되기도 하는데, 대중이 몰랐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또 다른 사회적 허점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한 허점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넷플릭스 영화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는 범죄자에서 주변 인물들로 관점을 이동하여 관객들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영화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 스틸컷
1969년, 싱글맘 리즈 켄들(릴리 콜린스)은 시애틀의 한 술집에서 다정하고 똑똑한 테드 번디(잭 에프론)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한 집에 살게 되고, 미래를 약속한다.

1974년, 젊은 여성들이 연달아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리즈는 테드와 너무 닮은 용의자의 몽타주를 보고 충격에 빠진다. 이후 연쇄살인 혐의로 기소된 그의 범죄 사실을 수년간 의심한다.


넷플릭스 영화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는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테드 번디는 1974년부터 1978년까지 최소 30명, 많게는 100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수는 지금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연쇄 살인'이라는 용어는 테드 번디의 범죄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됐다.

저는 결백해요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 테드 번디의 나르시시즘, 대사, 엽기적인 살인 방식, 주변 인물, 여성들로부터의 엄청난 인기 등이 영화에 그대로 묘사된다.


특히 대사는 테드 번디가 했던 말이 인용된 경우가 많다. 이는 언론에 자주 노출되고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재판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그가 남긴 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결백하다"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했다.  '당신은 죄가 없느냐'라는 질문에 "그 말에는 제가 다섯 살 때 만화책을 훔친 것까지 포함하나요?"라며 너스레를 떨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또, 언론 앞에서 공소 사실을 발표하려는 검사를 두고 "공소장이네요. 제 앞에서 읽는 게 어때요? 절 잡겠다고 했었어요. 읽으세요. 어서요"라고 마치 한 편의 쇼를 하듯이 호기롭게 말하며 크게 주목받았다. 극악한 범죄 혐의를 받는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는 그를 보고 판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여러 인간성이 다 합쳐진 쓰레기를
여기서 보게 된 건 비극입니다.


대사와 함께 영화의 중요한 요소는 그의 외모다. 테드 번디는 잔혹한 범죄사실에도 불구하고 법대생에 잘생긴 외모와 화려한 언변으로 많은 여성들을 설레게 하며 기형적인 팬덤까지 생성한 인물이다. 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후 팬레터가 쏟아졌다. 재판이 있는 날이면 법원 앞은 그를 보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여성들로 붐볐다.


잭 에프런이 이 역할을 맡은 것은 요즘 말로 소위 '찰떡'이라 할 수 있다. 소위 '할리우드 잘생김'의 대표 격인 스타가 아닌가. 그는 2006년 <하이스쿨 뮤지컬>에 출연하며 금발에 파란 눈, 조각 같은 이목구비에 미국 고등학교의 농구부 주장인 인기남으로 등장하여 십 대들의 우상이 되었다. 다음 해 <헤어스프레이>에 출연한 뒤엔 제임스 딘과 비교될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 않는가. 덕분에 잭이 연기하는 테드 번디가 언론 인터뷰나 생중계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여성 팬들이 설레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지지하는 모습이 설득력을 얻는다.

테드는 감옥에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


테드 번디는 실제로 여성을 유혹하는 데에 탁월했다. 이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그의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영화는 그중 두 명을 조명한다. 캐럴  분(카야 스코델라리오)과 리즈다. 캐럴 분은 테드 번디가 무죄라고 믿었던 여자다. 워싱턴 대학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캐럴 분이라는 여자는 재판 도중 테드 번디와 결혼했으며 훗날 그의 아들을 낳았다. 그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테드는 감옥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리즈는 그를 경찰에 신고하고 불안감에 떠는 인물로 작품 속에 등장한다. 실제로 리즈는 워싱턴에서 1969년 테드 번디와 처음 만나 1976년 그가 수감될 때까지 관계를 지속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테드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겼으며 신고 후에는 본인도 피해자가 될까 두려워했다.


이 영화는 제목이 영향을 준다. 국내 제목과 원제가 다르다. 국내에선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라고 공개됐지만, 원제는 <Extremely Wicked, Shockingly Evil and Vile>다. 테드 번디에 대한 재판에서 담당 판사가 했던 발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작품 속 번역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극도로 교활하고, 충격적이고 사악하며 비도덕적"이라는 뜻이다. 원제는 연쇄살인범인 테드 번디의 캐릭터를 드러내지만, 국내 제목은 그의 연인에게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제목으로 인해 국내 관객들은 리즈에 감정적으로 이입한 채로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라는 제목은 테드 번디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관객들에게 더 유효하게 작용한다. 미국인들에게 테드 번디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이춘재와 같은 존재다. 그가 역대 가장 사악한 연쇄살인자임을 알고 본다면 국내 제목의 매력은 다소 반감된다. 배경지식 없이 영화를 본다면 리즈와 같은 마음으로 테드 번디의 유무죄를 고민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범죄장면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논리적인 무죄 주장과 화려한 언변이 뻔뻔함과 궤변으로 잘 포장된 것임을 인식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리즈와의 동거생활이 매우 모범적으로 그려지면서 리즈와의 로맨틱한 첫 만남이 영화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것 역시 한몫한다.


하지만 사건에 대해 알고 본다 해도 흥미롭게 볼 수 있다. 관점을 범죄자가 아닌 주변 여성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편집을 통해서 드러난다. 테드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리즈의 모습과 살인사건 뉴스를 교차 편집하여 보여주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두 사람의 생활과 사건이 얼마나 무관하게 흘러가는지 보여주는데 이는 리즈의 시점이다. 그러면서 테드의 이중인격적인 캐릭터를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추격자>


이 같은 관점의 변화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자주 활용되는 편이다. 만인에게 알려진 범죄 사건이 영화화될 때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유영철을 다룬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있다. 두 영화가 흥미로웠던 것은 사건 자체에 새로움은 없지만 관점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추격자>는 시작부터 누가 범인인지 알고 시작한다. 서사의 무게 중심이 그를 추격하는 전직 형사 엄중호(김윤석)에게 있기 때문에 다른 방향에서 사건을 보게 된다. 또한 업소 여성 김미진(서영희)의 관점으로 관객들이 감정이입할 여지를 준다. 중호, 미진의 시점 가운데 지영민(하정우)을 위치시키면서 장르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모순적인 사회구조를 드러내는 데까지 이른다.


<살인의 추억>은 범인이 잡히기 전 제작되어 결말이 예상 가능한 영화다. 범인이 없는데 범죄영화를 어떻게 만든다는 것일까. 봉준호 감독은 관점의 이동으로 영화의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최초에 사건을 맡은 박두만 형사(송강호)로 시작해 백광호(박노식)의 증언, 서울에서 내려온 서태윤 형사(김상경)의 새로운 접근방법, 마지막으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로 관점이 이동한다. 범인의 관점도 등장한다. 영화 후반부에 산속에 숨어 있는 범인이 박두만 형사의 동거녀 곽설영(전미선)과 서태윤 형사가 반창고를 붙여줬던 여자 중학생 사이에서 누굴 살해할지 갈등하는 장면이 있다. 이러한 관점의 이동은 영화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모두가 아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새롭게 느껴지도록 하는 힘을 발휘한다.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는 리즈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때문에 결말에 도달할 때까지 테드 번디의 범죄 행위는 단 한 차례도 묘사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영화는 한 범죄자의 반사회적 행동을 드러내는 영화라기보다는 그를 대하는 주변인들의 '리액션(reaction)'을 보여주며 모순적인 상황을 지적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인 후 집에 오자마자 청혼하는 테드에 대한 리즈의 반응, 테드의 법정 사랑고백에 대한 캐럴 분의 반응, 기독교를 언급하며 연쇄살인마인 아들의 선처를 구하는 어머니, 그의 잘생긴 외모와 화려한 언변을 조명하는 언론, 미디어를 통해 접한 테드에게 매료된 대중 등이 그 예다.


그러면서 간과되는 것이 피해자들이다. 영화는 끝나면서 피해자들의 명단을 보여준다. 마치 관객들에게 '너네도 관심이 없었지?'라고 꼬집는 것 같다. 피해자들과 피해자의 유족들은 사건을 둘러싼 '리액션'으로 인해 2차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많은 영화들이 범죄를 다룰 때 관점의 전환을 꾀했다. 이처럼 피해자가 있는 범죄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당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부적절한 관점은 또 다른 피해를 만드니까. 일부 범죄 영화들은 적절한 관점을 찾지 않고, 그저 범죄의 잔인함과 자극적인 요소만 부각하여 지금까지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보성 어부 살인사건을 다룬 김성홍 감독의 <실종>, 연쇄살인범 강호순을 모티브로 한 이기욱 감독의 <살인자>가 전문가 혹평에 대중의 외면까지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당신은 현명한 젊은이예요.
좋은 변호사가 될 수도 있었죠.


테드 번디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던 판사의 말이다. 말 그대로 그는 똑똑했다. 공부를 잘했던 것 이상으로 머리가 비상했다. 로스쿨을 다니면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여해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기소된 이후에는 플리바겐(사전형량조정제도)을 거부하고 법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미디어를 이용해 대중을 선동하는 능력도 있었다. 그는 알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생각이 다양한 맥락에서 여러 관점으로 흩어져 있음을.  '연쇄살인마' 등과 같은 부정적 시선 외에 '핸섬 데블(잘생긴 악마)' 등과 같은 시선도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대중을 선동했다. 한 언론 관계자가 "당신은 바뀌지 않네요. 24시간 테드 번디로 있군요"라고 묻자 그는 밝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 이름은 좀 웃겨요.
테드 번디라는 이름은
매우 다양한 맥락에서 쓰여요.
저는 여전히 저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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