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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Dec 31. 2020

내 사랑의 모양은 당신과 다르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리뷰(후기), 결말, 해석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당신과 나는 달라


이 말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당신과 나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느낌인가. 배척하는 말인가. 폭력적인가. 의미를 잘 살펴보면, 어쩌면 이보다 따뜻한 말은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과 내가 다름을 인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존중의 의미다. 우리는 모두 다르니까. 단 한 사람도 같지 않다. 하지만 정상과 상식이라는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는 사람들을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사회에선 폭력이 될 수 있다.
그 사회의 기준으로 보자. 여기 '비정상'인 사람들이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존재들이다. 말 못 하는 청소부 여자, 인간이 아닌 생명체,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돈이 안 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 동성을 사랑하는 할아버지까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속 존재들이다. 모두 정상이 아니다. 백인이자 남성이며 이성애자이고 4인 가족을 꾸린 중산층이 '정상'인 사회에서 말이다. 영화에는 흑인이나 장애인, 동성애자나 괴생명체 같은 '비정상'이 대다수로 등장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들이 '정상'이라는 테두리를 거부하고 '비정상'이 없는 낙원으로 탈출하는 이야기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는 2017년 제74회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 제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감독상, 음악상 그리고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음악상을 수상했다.


※스포일러 주의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말을 못 하는 언어장애인이다. 미 항공우주 연구센터의 비밀 실험실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실험실에 온몸이 비늘로 덮인 괴생명체가 수조에 갇힌 채 들어온다. 엘라이자는 신비로운 그에게 이끌려 조금씩 다가간다.

실험실의 보안책임자는 괴생명체를 해부하여 우주 개발에 이용하려 한다. 이에 엘라이자는 그를 탈출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유니버설 몬스터스의 영향을 받은 영화다. 유니버설 몬스터스는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미라 같은 몬스터 캐릭터가 등장하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공포영화를 말한다. 특히 1954년 <검은 산호초의 괴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검은 산호초의 괴물>에는 아마존에 살고 있는 해양 괴물이 나온다. 그 괴물의 디자인이 상당히 유사하다. 이야기 또한 그 괴물이 한 여인을 사랑하면서 벌어지는 싸움이 있다. 때문에 <셰이프 오브 워터>에는 1950년대 향수가 묻어난 장면이 많다. 일종의 오마주다. TV 속 춤이나 노래가 1950년대에 나온 것들이다. 그리고 아래층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도 그렇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이야기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특징을 알면 이해하기 쉽다. 델 토로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주류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사회적 폭력을 당하다가 탈출하는 이야기다. <셰이프 오브 워터> 역시 그러한 플롯이다. 엘라이자와 괴물의 탈옥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괴물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는 괴물이 일상을 파괴한다. 안전한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괴물이 등장한다. 델 토로 영화에서는 이것이 반대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폭력적인 사회가 괴물을 억압하는 모순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야기 속 인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앞서가는 사람과 뒤쳐진 사람. 앞서 가는 사람의 대표적 인물은 스트릭랜드다. 스트릭랜드는 이상을 좇는 사람이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 패권 경쟁이 심화된 배경에서 그는 그 상황을 모두 합친 상징적인 캐릭터다. 우주 권력을 왜 차지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저 과학적, 정치적, 사회적 근거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는 그런 이상이 있는 인물이다.


손님은 미래를 향해
가는 분 같네요.


그 특징이 드러난 장면이 있다. 스트릭랜드는 자동차 매장에 가서 캐딜락을 살까 말까 고민한다. 이때 매장 직원이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손님은 미래를 향해 가는 분 같네요" 이 말에 그는 바로 차를 구매한다. 이 정도로 그는 현재나 과거보다 미래에 대한 집념이 가득하다. 1960년대 미국 주류 사회를 상징하는 백인 남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나머지 사람들은 뒤쳐진 사람들이다. 엘라이자는 항상 지각하는 사람이다. 괴물은 그 종의 마지막 개체다. 그는 '유통기한이 지난 생선'이라는 비유를 듣는다. 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화가 자일스는 고전 할리우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는데도 과거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자일스는 괴물에게 "우리는 한물간 골동품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골동품이 우주선을
쳐부수는 영화


이는 곧 이 영화의 주제와 밀접하게 와 닿는다. 이동진 평론가는 "골동품이 우주선을 쳐부수고 낙원을 찾는 영화"라고 평했다. 자일스가 그리는 그림이란 무엇인가. 그림은 그릴 때마다, 그리는 사람마다, 그리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가. 정해진 형태가 없다는 말이다. 사람이 직접 그렸다면 모든 그림은 다 다르다. 단 한 점의 그림도 같을 수 없다. 영화의 제목이 <셰이프 오브 워터> '물의 모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엘라이자는 혼자 살고 있고 말을 못 하지만 행복한 사람이다. 스스로 욕망을 충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초반부에서 그녀가 물이 가득한 욕조에서 자위를 하고 출근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자존감 높은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괴생명체와 만나 사랑을 나눌 때는 욕실 전체가 물로 가득 찬 공간이 된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이는 이들만의 사랑 방식이 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으로 세상이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어디를 가든지 그 사람 생각이 들고, 어디에도 그 사람이 묻어있다. 즉, 사랑은 어떤 형태가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에 모양이란 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사랑의 모양이 없듯이 제삼자의 사랑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엘라이자와 괴생명체의 사랑에도 모양은 없다.

영화 <그녀> (her)
사랑에 빠지면 다 미치게 돼.
사랑은 사회가 인정하는
미친 짓이거든.


영화 <그녀>(Her) 역시 다양한 모양의 사랑을 말한다. "사랑은 사회가 인정하는 미친 짓"이라고 언급하며 사랑의 형태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특히 섹스(Sex)의 형태를 자주 언급한다. 이 영화의 곳곳에서 여러 형태의 섹스를 언급하고 배치하여 주의를 환기시킨다. 섹시 고양이(SexyKitten)이라는 대화명을 가진 온라인의 상대방과 사이버 섹스(cyber sex)한다.


사람인 이사벨라와 인공지능 사만다와 함께 한 쓰리썸을 한다. 타티아나의 발을 굳이 대사에 포함시켜 성적 페티시를 보여준다. 애널 섹스를 언급하며 남자 둘의 동성애 그림을 본다. 영화 곳곳에 이를 삽입 배치했다. 사랑의 형태로서의, 모양으로서의 섹스를 고하려는 장치다.


이러한 영화들은 앞서 이야기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든다. 사실 그런 건 없는 거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언어장애 여성과 괴생명체의 사랑이 설정 자체만으로 거부감이 드는 분들은 있을 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설정을 넘어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들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어떤 특정한 사랑만 '정상'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그 테두리 바깥의 사랑을 모두 '비정상'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사랑이 물처럼 형태가 없다는 걸 엘라이자와 괴생명체의 사랑으로 보여준다. 결국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그녀가 사는 곳에서도 나타난다.


엘라이자는 오르페움 영화관 위층에 산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죽음의 세계를 넘어가는 예술가인 오르페우스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 영화관도 엘라이자와 괴생명체의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그녀가 괴생명체와 사랑을 나눌 때 집안에 가득 찬 물이 새면서 영화관까지 흘러내린다. 이때 그곳에서 졸고 있던 사람에게 물이 떨어져 잠을 깨운다. 현실이 영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델 토로 감독은 영화 속 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물은 장벽을 허무는
사랑의 상징


사랑의 형태는 자기 자신이 결정한다는 말이다. 결말에 이르면 '비정상'이 었던 존재는 '정상'들의 테두리를 벗어나 스스로를 정의한다. 엘라이자는 '정상'적인 인간의 몸, 삶 마저 거부한다. 아가미가 생기면서 하나의 괴생명체가 된다.


엘라이자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회적 '정상'을 탈피하는 것을 넘어 인간적 '정상'도 없는 것. 비합리적이고 불완전한 여정 그 자체가 사랑이라고 말한다. 델 토로 감독은 "물의 모양이 사랑의 모양이다. 물과 사랑은 모양이 없으며 필요한대로 자유자재로 모양을 취한다. 물과 사랑은 장벽을 허무는 힘을 지녔고 또 유연하다"라고 설명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물이 그렇다. 삶도 그렇다. 사랑은 더 그렇다. 그래야만 하는 모양은 없다. 물의 형태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폭력이 시작된다. 사랑도, 삶도, 인간도. 어쩌면 불완전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 여기고 규정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완전한 것은 없다. 원래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가.


우리 감정에는 모양이 없다. 우리는 그 여정에 온전히 몸을 맡기지 못해 자꾸만 기준을 만들고 위안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규정들 속에서 우리는 가장 인간다운 어떤 지점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잃는다. 이 영화는 시(詩)로 마무리하며 스스로를 잃지 않고 사랑하기를 바란다. 사랑은 편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고정된 형태일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하는 셈이다. 무정형의 상태로.


그대의 모양, 무언지 알 수 없네.
내 곁엔 온통 그대뿐.
그대의 존재가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고.
내 마음을 겸허하게 하네,
그대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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