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자주 싸우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 대하듯 서로를 비난했습니다. 어린 시절이라 싸우는 상황이 전부 이해되진 않았는데요. 다음날, 두 분이 아침밥을 함께 먹는 모습은 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저에게 아버지 흉을 봤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 어머니에게 "아빠 나빴어"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래도 아빠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냐"라며 저를 꾸짖었습니다.
당신은 욕해도 되고 아들은 안됐나 봅니다. "그렇게 싫으면 아빠랑 이혼해" 순수하고 어린 마음으로 내뱉은 말에 어머니는 "그게 또 그런 게 아니야"라고 모호하고 모순적으로 답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됐습니다. 그저 부모였던 두 사람이 과거에 지독히 서로 사랑했던 남자와 여자였다는 사실을. 결혼이라는 제도와 부모님의 감정 사이에 틈이 있었다는 걸. 결혼이란 게 모순으로 가득 차 있어 '그게 또 그런 게 아닌' 것이라는 걸.
과거 부모님 이야기가 생각난 건,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결혼 이야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결혼과 부부의 감정 사이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야기의 큰 틀은 부부가 이혼하는 과정인데요. 이혼 절차를 보여주면서, 결혼 생활 속에서 모순적인 상황과 태도를 반복해 나타냅니다. 영화 제목이 ‘이혼 이야기’가 아닌 '결혼 이야기'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LA에서 잘 나가던 배우 ‘니콜(스칼렛 요한슨 분)’은 연극 연출가 ‘찰리(아담 드라이버 분)’와 결혼한 후 뉴욕에서 10년째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이도 낳았고요. 같은 극단에서 배우와 연출가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니콜은 뉴욕 생활을 접고, LA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 입성하는 게 꿈인 찰리는 니콜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데요. 이후 두 사람의 관계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니콜은 선물을 잘 고른다. 잘 놀아 주는 엄마다. 춤을 잘 춘다. 팔의 힘이 좋아서 병뚜껑도 잘 따는데 얼마나 섹시한지 모른다. 수동 변속기 차량 운전도 잘한다. LA스타가 될 수 있었는데 다 포기하고 나랑 뉴욕에서 연극을 했다” “찰리는 뭐든 혼자 잘한다. 굉장히 깔끔해서 정리정돈은 믿고 맡긴다. 양말 깁기, 요리, 셔츠 다림질도 ‘뚝딱’이다. 내 감정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져주거나 폭발했다고 자괴감을 주지 않는다. 자수성가했다. 옷을 잘 입는다. 누군가 음식이 치아에 끼거나 얼굴에 묻으면 상대방이 민망하지 않게 알려준다”
첫 장면은 달콤한 듯 보였습니다. 니콜과 찰리가 서로의 장점을 이야기하면서 영화가 시작되죠. 마치 두 사람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부터 시작할 것처럼 보이는데요. 10분도 채 되기 전에 이 같은 예상은 빗나갑니다. 이 말들이 이혼 조정관 앞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니콜은 끝내 찰리의 장점을 쓴 글을 읽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를 뜹니다. 거창한 설명 없이 두 사람이 사랑했던 사이였으며, 이제 막 이혼 절차에 돌입했음을 짧은 장면과 대사만으로 알려줍니다.
이 작품은 이혼 과정을 다룹니다. 이혼 절차가 시작됐다는 건 아직 부부라는 뜻이죠. 부부 관계가 끝나지 않았지만, 끝나길 바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공연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이혼 조정기간이지만, 여전히 공연을 함께하죠. 집에도 같이 갑니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는데요. 니콜은 앉아 있고 찰리는 서 있습니다. 서로 이별하기로 합의했지만 이혼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는 함께 가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담겨있는 장면입니다.
법적 다툼이 시작되면서 비난 강도가 세지는데요. 두 사람은 변호사를 통해 서로를 공격합니다. 니콜의 변호사는 "찰리는 보잘것없는 연극을 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니콜이 찰리의 연극 때문에 인생을 희생한 것이라 말하죠. 찰리의 변호사는 "니콜이 아들을 인질 삼아 돈을 뜯으려 한다"고 공격하고요. "밤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며 엄마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죠. 찰리의 외도 주장도 나오는데요. 찰리 측은 "니콜이 찰리의 컴퓨터를 해킹하고 이메일을 보고 알게 된 것"이라며 "해킹이 사실이라면 중범죄다"라고 반박합니다.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법정 다툼 후 이어지는 장면들인데요. 소송이라는 진흙탕을 벗어나면 상대방을 챙기는 모습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찰리가 점심메뉴를 고민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찰리를 보고 니콜은 그의 취향에 맞춰서 음식을 대신 주문합니다. 또, 니콜은 집에 전기가 잘 안 들어온다고 찰리를 호출하는데요. 찰리는 니콜의 말에 불평불만 없이 수리하러 갑니다. 두 사람은 여러 이유를 언급하면서 결혼 제도를 벗겨 내는 중인데요. 상대방에 대한 감정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겁니다.
이는 두 사람이 10년 넘게 쌓은 ‘시간’과도 연결됩니다. 이혼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상대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요. 과거 사랑했던 시간, 생활을 함께하며 보낸 시간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혼을 위해 상대방의 단점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데요. 그 외 다른 것들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이는 나와 가족들이 앞으로 다른 형태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혼은 승리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기 위해 하는 일이라는 거죠. 그래서 영화는 결혼의 제도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을 지속해서 분리합니다.
이러한 장면은 ‘장 르누아르’ 감독의 전쟁영화 <위대한 환상(1937)>을 떠올리게 합니다. 프랑스가 독일을 공격하고 있는 전시 상황에서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전쟁과 식사가 모순적으로 느껴집니다. 노아 바움백 감독은 <위대한 환상>을 언급하며 "그런 전쟁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적인 면이 이혼과도 비슷한 거 같다. 낮에는 중재하거나 법원에서 대리인을 통해 상대를 모욕하더라도, 집에 돌아가서는 함께 아이의 숙제를 봐줘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결혼 제도와 인간의 감정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혼 절차가 끝난 후 두 사람의 관계는 전처럼 좋아지는데요. 혼인 관계는 끝났지만, 서로의 시간을 배려하고 신발 끈을 묶어줄 수 있는 사이로 남습니다. 제도와 감정이 분리되어 있다는 걸 두 사람의 행동을 통해 나타내는 겁니다. 두 사람은 인간적인 문제가 없습니다. 서로의 커리어를 존경하고요. 여전히 각자의 능력과 강점을 인정합니다. 부부가 되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만 관계 유지가 어려웠던 겁니다.
찰리는 결혼생활을 다룬 뮤지컬 <컴퍼니>의 'Being Alive '를 열창하는데요. 이 장면은 묘한 울림을 줍니다. 이 노래가 찰리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면서 영화의 주제를 압축해 보여주기 때문이죠. 가사를 보면, 모순적인 문장이 번갈아 이어지고요. 그 문장들은 충돌을 일으킵니다. '날 너무 꼭 아는 사람'에 이어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이라는 가사가 나오고요. '날 너무 잘 아는 사람' 다음에 '날 마비시키고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이어지는 식이죠.
이때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아버지를 흉보다가 제 맞장구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냐"라고 꾸짖던 어머니 말입니다. 결혼이 ‘그게 또 그런 게 아니’라는 게, 어떤 말인지 작은 이해를 하게 된 순간이었죠. 그 말은 위 노래 가사처럼 결혼의 모순을 잘 담은 표현일 수 있습니다. 니콜과 찰리 또한 ‘이혼했는데 왜 서로 신발 끈을 묶어주느냐’라고 물어보면, ‘그게 또 그런 게 아니다’라고 말할 겁니다. 이혼 조정 과정에서 상대방의 장점을 쓰라고 했을 때, 니콜은 끝 부분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