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다시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삶을 시작했다. 마음은 아직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기계적인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횡단보도에 서서 멍 때리다 잠깐 마음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다 아니라고 자답했다.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아닌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 대답까지 닿기 전에, 여행은 뭘까? 하고 또 자문했다. 내가 말하는 여행의 정의. 내가 눈으로 봐왔던 여행. 그것은 새로운 것을 보고, 길 위에서 친구를 사귀고, 갈림길에서 스스로 결정하는 것.
나는 여행하며 그런 것들에 수없이 마주했지만 아직까지도 친숙하지 않다. 어쩌면 스트레스를 받는 편에 더 가까울지도. 여행에 있어 나는 원하는 것과 즐기는 것의 간극이 크다. 여행하며 경험하는 것들은 내가 원하는 것에 가깝지만 쟁취에 따르는 고통 때문에 결코 여행을 좋아한다고 자답할 수 없다.
왜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것에 일 년 넘게 시간과 마음을 쏟아 원을 그렸나. 그리고 몇 년 동안 추억 주위를 떠돌다 못 이겨 다시 두 달을 쓰고 지난 발자취를 찾아 서성거렸나. 평소에 이성적인 사람이라 자부하는 나로서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참 고통스럽다. 취한 눈으로 보던 세상을 다시 가지고 싶어 연거푸 독주를 들이켜 억지로 몽롱해지는 것. 그 기운에 흥을 내 잠시나마 행복해지는 것. 그리고 깬 후에는 숙취에 괴로워하고 다시 어제를 그리워하는 것. 잡히지 않는 물이나 공기 같은 무언가를 손에 쥐려고 끝없이 방황하는 모습. 그리고 결국 무언가를 쥐었다 생각해서 꽉 진 주먹. 결국 빈 손이 가득한 착각에 껍질만 든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던 어떤 날들.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던 긴팔 티셔츠를 손목까지 다시 잡아당겨 내렸다. 콜카타는 무척 더웠는데, 서울은 그렇지 않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걸음이 길다. 결국 오래 여행할수록 돌아오는 길도 멀어지는 걸까. 다시 사회 안에 속하는 것이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선택한 게 혹시 타협을 통한 속박은 아니었나. 슬프다. 그렇게 지내고 있다. 바라나시의 가트를 떠올리며, 오로빌의 수다를 추억하며, 고아의 신비로움을 기억하며. 뒤를 돌아 새로 쌓여 올라간 추억 탑을 본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여 온다고 하던가. 그 꼴이다. 헛웃음이 나오지만, 이번 여행도 후회하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다시 떠나지 않을까. 추억이 가난한 사람이 되기 싫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