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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Jan 07. 2020

첫 여름

'첫' 이라는 말은 설렘, 살짝, 떨림을 담은 마음주머니 같다. 러시아는 처음이었다. 남부의 작은 도시. 며칠 만에 구경이 끝나, 약간 시시하다는 기분이 든 날이었다. 마침, 호스텔에 단체로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이 묵게 되었다. 금새 친해져서 장난치다가 불쑥 나는 말했다.

"오늘 밤 나에게 러시아를 가르쳐줘."

그들은 알았다며 뭐가 좋은지 신나 했다. 밖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길에 들러야 할 곳이 많았다. 다 제끼고 엉뚱하게 서점에서 멈췄다. 직원에게 말했다.

"빠로쓰끼, 알파벳, 베이비." 책꽂이 한 칸을 그녀와 함께 싹 다 뒤져서 한 개 골랐다.


약속대로 밤에 우리는 부엌에 모였다. 세 명의 소년들과 나는 식탁에 동그랗게 앉았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어 알파벳은 영어와 비슷해서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이외로 알쏭달쏭했다. 영어P 는 러시아어 R이 되고, C는 S, H는 N이다. 이번엔 E 가 머리 위에 점 두개를 하고 나타나서 나를 애먹였다. 키가 크고 마른 애가  벌떡 일어나서 "헤이.요오!"했다. 소년의 난데없는 힙합 춤에 우리는 끼룩거렸다. 한방에 "요오" 발음은 해결됐다.


나의 입술, 혀, 목은  조화롭게 소리를 만들려고 애를 썼다. 쓰지 않았던 얼굴 근육은 딱딱해져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셋이 한 번에 웃음보가 터졌다. 나 자신도 모르게 러시아로 욕을 했다는 것이다. 계속된 나의 실수에 선생님들은 자지러졌다. 다음 ZH에서 나는 맥을 못 췄다.원래 영어발음 Z앞에서도 늘 기가 죽었다. 고전하는 나를 보고  위로하듯이 셋이 한꺼번에 진동을 했다. 즈즈으으즈즈. 좁은 공간은 체취, 키득거림, 전기면도기 같은 진동소리, 침 범벅이 되었다. 널찍한 부엌은 할아버지가 텔레비전 보는데 시끄럽다고 우리를 쫓아내서, 코딱지만 한 곡간 같은 곳에 있었다. 바람 한 점 통하지 않았다. 소년 선생님들은 내가 쩔쩔맬 때마다 부지런히 입을 움직였다. 핑크빛 보드라운 입술들은 오므렸다, 벌렸다, 주름졌다. 가래 뱉는 듯한 탁한 소리를 목 깊은 곳에서 보내기도 했다. 소년들은 거침없었다.

첫 러시아 단어는 내가 여름에  제일 좋아하는 수박,  첫 동물은 하마. 책 한 장을 넘기면 첫 음식, 빵이 나왔다. 달콤한  빨간 수박과 시큼하고 쌉싸름한  흑빵은 러시아  첫 여름에  제격이었다. 내  몸에 꼭 필요한 낱말을 만났다. 자작나무 숲에 첫 발을 들인 아기처럼, 나는 들떴다.  이국적인 공기로 가득 채워진 나의 폐는 풍선처럼 부풀었다. 모든 사물이 낯설고 신비롭게  보였다. 익숙한 사물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임무가 내게 주어졌다.

아르부스,  베게모트, 흐렙.


사람들과  함께 부엌, 소파, 식탁에서 보낸 기억만큼, 나의 입술 모양이  그들과 닮아갔다. 적절한 표현이 시간에 맞춰 내게  배달되었다.

아침에 눈이 마주치면 : 도우브레 우뜨라

밤에 잠들기 전에:  도우브레 노치  

새로운 여행자가  도미토리에 오면 : 드라스비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디저트를 내밀었 을 때 : 스빠시빠, 브쿠스나

소년 선생님들과 헤어질 때:  빠까, 스빠시빠

부엌에서  생선 수프를 끓이던  할머니가  냄비를 보며 :  우하


살점 맛이 진한 생선 수프, 단물이 빠지는 과일,  노천욕에서 맡은 계란 냄새, 매끄러운 피부, 원피스 사이로 닿는  바람결, 자음과 모음 소리. 무심코 던진 여행자의 한 마디에 소년들은 러시아의 여름을 선물했다. 연필에 꾹꾹 힘을 줄  때마다, 나의 자작나무 숲은 조금씩 확장되었다. 숲에서  나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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