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무지 많은 게 좋다. 아침부터 침대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그게 하늘이든 비든 퍼질러서 멍 때리기. 손에 잡히는 게 과일이면 베어 물면서 단맛을 만끽하기. 휴대폰이면 페북질 하기. 이렇게 밍기적 거리는 게 좋다. 반대로 단숨에 일어나 씻지도 않고 슬리퍼 신은 채 동네 마실 다니는 일도 즐겁다. 하여튼 나는 개인 시간이 많아야 하는 사람이라서 시간을 누구에게 내줄 때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며칠 전, 그 남자가 내 옆에 앉았다. 그를 호스텔 부엌에서 여러 번 마주쳤는데, 한 번도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게 이상하다. 사람들은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라서 호기심에라도 말을 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인사말 또는 눈인사는 좁은 공간에 있으면 나누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그를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다. 식사 준비할 때마다 그가 후라이팬에 고기를 굽고 있었다. 가끔 스파게티도 곁들이는데, 그 요리라는 게 토마토 소스없이 나사 모양의 짧은 면만 삶아서 말 그대로 하얀 것을 고기와 먹는다. 흔한 토마토, 오이 샐러드도 보질 못 했다. 그에 대해 덧붙일 수 있는 건 우유를 마신다는 정도였다. 이것 말고는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는데, 그에 대해 꽤 안다는 착각이 드는 건 그의 식성과 조용히 혼자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가 가까이 앉았을 때도 당연히 본인 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를 보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 화면에는 "오늘 저녁에 뭐 해요?"라고 영어 번역기가 말하고 있었다.
"그건 왜요?"라고 나의 러시아 번역기가 말했다. " 외로워서요." 세상에나. 요즘에 아무도 외롭다는 말을 대놓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대신 "저녁 먹으러 가요. 술 같이 마셔요. 커피 안 마실래요? 마사지해 줄까요? 분위기 좋은데 알고 있어요. "라고 했다. 벌침을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외로움이라는 글자에 피부가 따가웠다.
"친구 없어요?" "없어요. 시베리아에서 왔거든요. 여기 숙소에는 가족이나 나이 든 사람들이 많아서 심심해요." 생각해 보니 내가 자는 도미토리에는 죄다 할머니들이다. 아마 휴양 온천하는 곳이라서 그럴 거다. 화면 속에서 우리는 소리 없이 얘기했다. 도시가 다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가기로 했다. 걸어서는 한 시간 반쯤 걸리는데, 나는 해 지기 전에 사진을 찍고 싶었다. "케이블카는 얼마예요?" 내가 물었다. "200 루블쯤 해요." "비싸요." "걱정 말아요. 내가 낼 께요." "왜요?"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서요." 우린 식성도 언어도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데, 뭘 할 수 있을지 물음표였다. 벌침만 아니었다면 난 가지 않았을 거다.
케이블카를 내리자마자, 그가 포즈를 취하라고 했다. 어디선가 사진사가 나타나서 훅 우리 둘 사진을 찍었다. 곧 기념사진 한 장을 나에게 그가 내밀었다. 그는 정말 성가시게 했다. 물어보지도 않고 유치한 기념사진을. 케이블카 4천 원과 비쌀 것 같은 사진값만큼이나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내가 그의 휴대폰을 가져와서 사진을 찍었다. 식성만큼이나 포즈도 단순했다. 나는 까다로운 주문을 했다. 그는 본인 사진을 맘에 들어했다. 내가 찍으려고 했던 풍경사진도 서둘러 찍었다. 본격적으로 앉아 유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엘부르즈를 감상하고 즐기고 있을 때, 그는 가자고 했다. 나는 샐러드 먹는 중인데, 그는 고기만 먹고 서둘러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그를 5분 거리에 있는 다른 방향으로 데려갔다. 저녁노을이었다. 그는 이 언덕에는 와봤지만, 노을 지는 이 장소는 처음이라고 했다. "영혼에 좋은 곳이네요!"
그는 여러 번 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민소매 바깥으로 보이는 체대생 같은 근육은 외로움, 영혼과는 무관하게 보였다. 그 날 우리가 함께 본 노을은 가장 옅은 색 번짐이었다. 지난번, 혼자 여기서 본 색은 강렬한 색이어서 자랑하기 좋았다. 오늘의 이 옅은 색은 필름 카메라로 찍은 느낌이었다. 마음의 온기 같은 것이었다. 마지막 그의 주문은 나에게 등을 돌리고 서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손을 뒤로 잡아서 사진을 찍었다. 그 유명한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의 손을 잡고 여행 명소를 찍는 컨셉트었다. 그의 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그는 여자 친구와 이런 것들이 하고 싶었나 보다.
이렇게 된 김에 데이트의 마지막은 내가 제안했다. 그가 사 온 재료들로 내가 요리했다. 양고기를 황금색으로 굽고 자주색 양파도 썰어 넣었다. 가지. 토마토. 애호박을 두꺼운 스테인레스 냄비에 넣고 졸였다. 스파게티면을 삶았다. 하늘색 접시에 양고기를 깔고 레몬 한 조각을 얹었다. 가지 씨들과 함께 즙이 살짝 나온 야채 요리.처음 사 본 얇고 납작한 계란 스파게티면이 떡진 머리카락처럼 딱 달라붙었다.밤 11시에 저녁을 먹었다. 그는 맛있다고, 고맙다고 했다. 남자의 이름은 러시아 소설에 나옴직했다. 드ᆞ 미ᆞ 트ᆞ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