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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Jan 08. 2020

한 사람이 온다

세상  모든 호스텔은 나의 집이다.

트빌리시, 모스크바, 트롬소, 헬싱키, 쉬라즈, 바쿠, 스톡홀름, 시비우, 키예프, 런던, 훈자, 에딘버러, 방콕에서 잠자고, 요리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도미토리에서는 모든 걸 나누어야 한다. 좁은 공간인지 여행자의 마음가짐인지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당신이 원하든 아니든 간에 나누게 되어 있다. 여행자가 남기고 간 '나를 먹어 주세요, 나를 마셔 주세요.'라고 적힌 냉장고 안의 와인병, 파스타 봉지. 침대 맡에 놓인 쪽지, 장미 한 송이, 흐느끼는 울음소리, 맥주 냄새, 통화내용, 수건의 물기, 속옷.


겨울이라 도미토리 방을 혼자 쓰다시피 했는데, 젊은 영국 남자가 저녁에 왔다. 인사를 몇 마디 나눴는데, 그의 목소리가  영화대사처럼 귀에  또박또박 박혔다. 는 소리에 아주 예민하고, 특히 한두번 스치는 사람 목소리를 다 기억할 정도다. 거꾸로 오랜 친구가 안경을 꼈는지 아닌지는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단박에 남자의 목소리에 끌렸다. 알렉스는 영화를 찍고, 연기를 한다고 했다. 가끔 자신의 목소리를 광고회사에 판다고도  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던 이야기, 목소리 바꾸는 법을 들려 주었다. 곧 그는  목젖을  마음대로  움직여 런던, 에딘버러, 뉴캐슬, 뉴욕,시드니에 사는  동네사람으로 변신했다. 나는 스탠딩  코미디 배우같은 알렉스의  공연에  빠졌다.


이번엔 내 차례. 머리카락 파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태어날 때 소유한 목록에 대해 얘기했다. 목소리, 머리카락, 피,섹스 그리고 후천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시간과 돈의 개념. 공통점이 있다면, 원한다면 모두 팔 수 있다. 그리고 댓가를 얻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을 팔고, 알렉스와 나는 이야기를 팔고 다. 새벽까지 자신의 무언가를 파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도.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각자 짐을  싸느라 바빴다. 샤워를 하고  방에  와보니 침대맡에 종이가 있었다.

"만나서 반가웠어. 계속 글을 써. 너의 이야기가 세상에 필요해. 알렉스."

 뒷장은 렌트카 계약서였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 했다. 나도 다른 도시로 떠날 계획이었다. 마지막으로 언덕에 올라 성곽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도시를 눈에 담았다. 시계탑, 검은 교회, 광장을 걸어다니는 손톱 크기만한 사람들. 핑크색 지붕.


가방에서 접어둔 알렉스의 문장을 꺼냈다. 곧 기차를 타야 할 시간이었다. 조금 주저하다가 기차를 놓치기로 했다. 다음 도시는 나를 기다려 주겠지. 그런데, 지금 브랴쇼브 망루에서 나에게 찾아온 이 손님은 처음이고 어쩌면 마지막 일수도 있다. 그러니 당장 시간을 내서 대접해야 했다. 그의 글을 소리내서 읽고 소리내서 생각했다.


광장을 보았다. 잿빛도시에 갑자기 햇살이 비쳤다. 망루계단에 앉아 빛과 문장으로 샤워를 했다. 사십 분 후에 손님은 충분했다고 말하며 사라졌다.나는 내가 태어난 목적,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질문의 모양을 조금만 비틀어 보면  대답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알고 있다 . 언젠가 첫번 째 소설을 쓰고 나면, 알렉스의 편지를 꺼내  보고 싶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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