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창백한 한 개의 점이다. 점의 모양과 성질로 살기 때문에, 나의 세계는 내게 익숙한 유산이다. 느닷없이 낯선 점과 접촉하기 전까지는, 스스로의 변덕, 버릇, 수상함, 매력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다. 두 점이 만나면, 세포 분열을 한다. 상대가 내게 반사한 인공위성이 중간 지점에 태어나고, 세 개의 점은 세모 모양으로 연결된다. 꼭지점에 타인의 점은 무한대로 연결되고,변신은 끝이 없다. 로보트를 조립하고 합체하는 것처럼. 삼각형, 다이아몬드, 조각 케이크 , 사각형, 색종이, 바람개비, 주사위. 사방으로 연결된 자아는 경계가 느슨해지고, 거울은 제멋대로 해석을 한다.
당신은
너무 넘쳐. 턱없이 부족해. 용기 있어. 바보 같아. 꼭 필요해. 별 도움이 안되.
겹칠 수 없는 반대말이 동일한 인물을 정의하고, 당사자는 혼란에 빠진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어, 스스로를 실험한다. 달이 지구를 돌듯이, 닮고 싶은 행성 주위를 돌며 말투, 옷차림, 색깔, 꿈, 태도를 몽땅 흡수한다. 하루는 사진 속 원피스 입은 내 모습이 타인의 욕망임을 알아차리고, 치마를 찢는다. 속이 텅 빈다. 불완전한 페르소나는 타인 앞에서 본능적으로 옷깃을 단단히 여민다. 그러나, 단 하나의 모양과 정신으로 사는 인생이 갑갑하고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온다. 나로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시점 말이다. 이번엔 외투를 벗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의 눈을 본다. 자아는 길들여지고, 도망치고, 선택한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삶의 모양을 통과했다. 요리할 때 타이머를 맞추고, 아파트 사용설명서를 정독하는 미스터 매뉴얼
종이를 썰고, 알파벳을 조합해서 집에서 책을 만드는 미스터 수고양이 무어
창작 모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이 원하는 글쓰기 모임을 만든 미스터 영화 습작생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를 쓰고, 파는 미스터 길거리 시인
오늘 저녁 내 모습. 어디서 부터가 원래 나의 유전자이고, 무엇 부터가 모방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스파게티면을 눈대중이 아니라, 겉봉지에 적힌 숫자만큼 삶는다. 물건을 사면, 사용설명서는 읽고 보관한다. 드라마를 보다가 내 입맛에 맞게 줄거리를 바꾸고, 새로운 배우를 캐스팅한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지 못할 때, 자신부터 만나고 싶은 그 사람이 되기로 한다. 세상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 나를 중심으로 원을 그린다.
한 시절 탐닉했던 세계가 사라진 줄 알았지만, 사랑했던 순간들은 돌아와 나의 일부가 된다. 나는 스쳐갔던 사람들의 퍼즐이다. 반대로 영원히 한 몸이라고 생각했던 일부가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부러진 장난감 팔처럼 , 자신만의 세계는 무너진다. 좌표는 모호하고, 상실과 외로움이 반복된다.
어떤 작별은 완벽하게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겪고 나면, 틈을 막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구멍이 채워지고, 비워지는 동안 미미한 점은 촘촘하고, 묘한, 마술 같은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 애인에게 키스를 하고, 볼을 만지는 일은 나의 모양과 깊이를 확인하는 행위이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닿지 못하면, 내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통과한 개인의 우주이다. 레고 블록을 쌓고, 흐트러뜨리는 것처럼, 날마다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우주의 팽창과 수축은 끝이 없다. 결국 우리는 사랑하게 될 테니깐, 어떤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