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할 수 있어'라는 달콤한 독
선생님, 저도 열심히 하면 ‘인서울’ 가능할까요?
상담실 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의 눈빛은 간절하다. 그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하곤 했다.
당연하지. 지금부터 선생님 커리큘럼 딱 따라오고,
독하게 마음먹으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어.
너는 잠재력이 있잖아. 목표는 크게 잡아야지.
아이의 표정이 환해진다. 나는 그 순간을 즐겼다.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참된 스승이 된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나의 확신에 찬 말 한마디에 아이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는 고양감. 그것은 달콤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펴보니, 그 상담 일지에는 빨간 줄이 가득하다.
물론 긍정적인 면이 없었던 건 아니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목표라도, 그것을 향해 전력 질주하게 만드는 동기부여의 힘은 분명 있다. ‘꿈은 크게 가지라’는 말은 교육의 영원한 격언 아니던가.
하지만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내가 준 것이 ‘희망’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마취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는 ○○대학에 갈 재목이야"라는 말에 취한 아이들은 정작 발밑을 보지 않았다. 당장 채워야 할 중학교 수준의 어휘, 구멍 난 기초 문법은 시시해 보였을 것이다. 시선은 저 높은 대학 간판에 고정되어 있는데, 흙바닥을 다지는 기초 공사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결국 현실 감각은 무뎌지고, ‘나는 특별하니까 나중에 다 해결될 거야’라는 근거 없는 낙관만 남는다. 가장 치열하게 기본기를 쌓아야 할 시간에, 아이들은 내가 불어넣은 헛바람을 안고 붕 떠 있었다.
더 아픈 것은 결과가 나왔을 때다. 입시는 냉정하다. 기적은 드물고 통계는 정직하다.
특정 대학과 학과를 유일한 정답인 양 제시했을 때, 그 목표 달성에 실패한 아이는 갈 곳을 잃는다. 단순히 ‘대학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넘어, ‘내 인생이 망했다’고 받아들인다. 삶의 기준을 온통 그곳에 맞춰두었기에, 목표의 상실은 곧 자존감의 붕괴로 이어졌다.
선생님, 저 이제 어떡하죠? 다 끝났어요.
합격자 발표 날, 울먹이는 아이의 전화를 받으며 나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차라리 "어느 대학에 가야 해"가 아니라 "어떤 어른이 되고 싶니?", "어떤 삶을 살고 싶니?"를 물었어야 했다. 대학이 종착지가 아니라 과정일 뿐임을, 설령 그 대학에 가지 못해도 너의 삶은 여전히 빛날 수 있음을 가르쳐줬어야 했다.
나는 밖에서 꽤나 잘 가르치는 강사, 아이들의 성적을 올려주는 전문가로 알려져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면의 오답노트를 적어 내려가는 지금, 나는 부끄럽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왔는가.
이제는 상담의 방식을 바꾸려 한다. 허황된 무지개를 보여주는 대신, 당장 올라야 할 계단 하나를 보여주기로 했다.
지금 너의 위치는 여기야.
저 위를 보면 까마득하지만,
오늘 이 단어장 하나를 외우면 한 계단 올라가는 거야.
화려한 비전 제시는 줄었다. 아이들의 눈이 예전처럼 단번에 반짝거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아이들이 기본에서부터 서서히, 단단하게 상승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 100미터 달리기 기록을 억지로 당겨주는 코치가 아니라, 긴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게 곁에서 뛰는 페이스 메이커가 되는 것.
그것이 내가 다시 쓴 두 번째 오답노트의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