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문제의 유혹, 글 한 편의 힘
자, 이번 주 과제는 모의고사 3회분이다. 시간 재서 풀고 채점해 와.
나는 아이들에게 두꺼운 제본 교재를 안겨주며 뿌듯해하곤 했다. 수북이 쌓인 문제집, 빽빽하게 채워진 동그라미와 빗금들. 그것이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내가 잘 가르치고 있다는 증명서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의 세 번째 오답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문제를 파는 장사꾼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건 어렵다. "이 문장은 저 문장과 이렇게 연결되고, 글쓴이의 의도는 행간에 숨어 있어"라고 설명하는 과정은 추상적이고 지루하다. 아이들의 눈은 금세 흐릿해진다.
반면, 문제 풀이는 명쾌하다. "이 문제의 정답이 3번인 이유는 여기에 단서가 있지? 딱 떨어지지?" 이렇게 설명하면 아이들의 눈이 반짝인다. 선생님의 해설이 기가 막히다며 감탄하기도 한다. 나는 그 반응에 취해 있었다. 뭔가 있어 보이는 강의,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같은 해설을 해야만 '일타 강사'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본질적인 '읽기'를 가르치는 대신, 기계적인 '풀이'를 강요했다. 글을 음미하고 소화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더 많은 문제, 더 많은 변형 문제를 들이밀며 아이들을 몰아세웠다.
결과는 어땠을까? 양치기(양으로 승부하는 공부)로 단련된 아이들은 익숙한 유형의 문제는 기계적으로 잘 풀어냈다. 하지만 조금만 낯선 지문, 호흡이 긴 글이 나오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스스로 글을 뚫고 들어가는 힘, 즉 '문해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화려하게 해설해 줄 때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아이들은 혼자서 글의 숲을 헤쳐 나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 게 아니라, 내가 잡은 물고기를 화려하게 요리해서 떠먹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수업 방식을 완전히 바꿨다. "몇 문제 맞혔니?"라고 묻는 대신 "이 글에서 필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니?"를 묻는다.
당장 눈앞의 점수를 올리는 데 급급했던 '입시 기술자'의 옷을 벗고, 조금 느리더라도 아이가 스스로 글을 읽어낼 수 있도록 돕는 '문해력 조력자'가 되기로 했다.
아이들은 처음엔 힘들어한다. 답만 딱 알려주면 편할 텐데, 왜 자꾸 생각을 하게 만드냐며 투덜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결국 묵묵히 글을 읽어내는 힘을 기른 아이가, 마지막 순간에 웃게 된다는 것을.
좋은 스승은 아이들 앞에서 화려한 묘기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가장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읽기의 과정'을 함께 견뎌주며, 아이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이다.
오늘도 나는 문제집 대신 텍스트 한 장을 아이 손에 쥐여준다.
급할 것 없어. 천천히, 제대로 읽어보자.
이것이 내가 과거의 오답을 지우고 다시 쓴, 세 번째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