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왜 안 돼?"라는 오만
나는 주로 상위권 학생들을 가르쳤다. 소위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과 호흡하다 보니 자연스레 눈높이가 천장에 닿아 있었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오답이었다.
이 정도는 다 알지? 넘어간다.
나는 습관처럼 말했다. 내 기준에서 이 정도 설명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흔히 스포츠계에서 "전설적인 선수는 훌륭한 감독이 되기 어렵다"는 말을 한다. 천재적인 감각으로 플레이했던 그들은, 평범한 선수들이 왜 그 기술을 소화하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보고 빈 공간에 차면 되잖아. 이게 왜 안 돼?"
나의 수업이 딱 그랬다. 이미 텍스트를 능숙하게 읽어내는 내 머릿속 회로를 아이들에게 강요했다. 대한민국 입시 제도는 9등급제다. 통계적으로 1, 2등급을 제외한 약 90%의 학생들은 3등급 이하다. 하지만 나는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 대부분을 '잠재적 1등급'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수업 시간,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 나는 안도했고, 심지어 우쭐했다. '역시 내 설명은 깔끔해.'
하지만 그것은 거대한 쇼였다. 아이들은 설명을 듣는 그 순간만큼은 이해가 되는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선생님이 풀어주는 논리를 따라가면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막상 펜을 잡고 혼자 풀려하면 막막해지는 그 기분. 아이들은 '안다'라고 착각하며 나를 속였고, 나는 그 반응에 취해 '잘 가르쳤다'라고 나 자신을 속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제 와서 다시 복기해 본다. 그렇다면 나는 왜 아이들의 눈높이로 내려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 몰라서 그랬을까?
아니다. 외면하고 싶었다. 친절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가 스스로 풀 때까지 옆에서 지켜봐 주고, 막히는 부분을 짚어주고, 쉬운 말로 풀어서 다시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학원 강사로서, 생활인으로서 나는 '효율'을 쫓았다. 더 많은 수업을 해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한 명 한 명 붙잡고 씨름하는 '느린 수업'은 당장의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진도'라는 핑계 뒤에 숨어, 아이들의 이해하지 못한 눈빛을 모른 척 넘겼는지도 모른다.
네 번째 오답노트를 적으며 다짐한다. 나는 더 친절해져야 했다.
"이게 왜 안 돼?"라고 묻는 대신, "어디서 막혔니?"라고 물었어야 했다. 멋진 판서로 진도를 쫙 빼는 강의보다, 펜을 멈추고 끙끙대는 아이의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는 10분이 더 절실했을 것이다.
나의 지난 수업은 화려했지만 불친절했다. 이제 나는 조금 느리더라도, 아이들과 보폭을 맞추는 법을 다시 배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