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이라는 함정, "이걸 몰라?"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며 아차 싶었지만, 솔직한 내 속마음은 그랬다. '아니, 문맥을 보면 딱 나오잖아. 이게 왜 안 읽히지?'
돌이켜보면 나도 처음부터 잘 읽었던 건 아니었다. 고등학생 시절, 그리고 국어교육과에 갓 입학했을 때만 해도 시(詩)는 암호문 같았다. 화자가 누구인지, 이 상황이 이별인지 사별인지, 정서는 슬픔인지 체념인지 분석하는 과정은 늘 턱턱 막혔다. 밑줄 긋고 외우지 않으면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수천 편의 시를 읽고 가르치다 보니, 이제는 소위 '관성'이 생겼다. 처음 보는 낯선 시를 받아도 몇 줄 읽어 내려가면 구조가 보이고, 시어 하나만 봐도 주제가 짐작된다. 머리를 쥐어짜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문제는 이 '익숙함'이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오랜 시간 쌓아온 공부의 관성과 습관은 학자로서의 나에게는 축복이다. 하지만 초심자를 이끄는 교사로서의 나에게는 재앙일 수 있다.
나는 3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지금 나의 눈높이를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여기를 보면 느낌이 오지 않니?"
아이들에겐 아직 그 '느낌'을 쌓을 시간이 없었다는 걸 잊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30년 전의 나를 데려와 앉혀놔도 지금 내가 설명하는 내용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을 게 뻔한데 말이다.
나의 능숙함이 아이들에겐 불친절함이 되고 있었던 셈이다.
누군가 말했다. 진정한 '메타인지'를 가진 고수는, 자신이 아는 내용을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에게 설명해서 이해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 기준에 비추어 보면,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무능한 강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는 알겠지"라는 전제를 깔고, 전문 용어를 섞어가며, 논리의 단계를 듬성듬성 건너뛰는 강의. 내가 편한 강의를 하면서 나는 그것이 수준 높은 수업이라고 착각했다.
사실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내려가 쉽게 풀어낼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던 것인데 말이다.
오늘 쓴 일곱 번째 오답노트의 내용은 '관성의 제거'다.
내가 가진 직관과 배경지식을 걷어내고, 아무것도 모르는 하얀 백지의 상태에서 텍스트를 바라보는 연습. 30년 전 시 한 편을 붙들고 끙끙대던 그 시절의 답답함을 다시 기억해 내는 것.
"이걸 몰라?"라는 말 대신, "그래, 이건 원래 어려운 거야. 나도 그랬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여유.
그것이 내가 깨야 할 습관이자, 다시 써야 할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