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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있는 비밀 1-(4)

내용없는 형식없고, 형식없는 내용없다.

by 하늘을 나는 백구
운문 문학과 관련된 문제를 풀다 보면 내신형이든 수능형이든 반드시 나오는 유형이 '표현상의 특징 및 효과 파악하기'다. 대개 이 문항을 풀기 위해 다양한 표현법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사한 표현법이 사용된 다른 작품까지 외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도무지 '시(詩)'를 읽는 재미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 문학을 암기과목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EBS 수능특강과 수능완성에서 문학 작품을 반영하여 수능에 출제한 이후 변하지 않는 학생들의 공부법이다.)

아래 작품을 읽어보고 어떤 표현법이 사용되었으며, 어떤 효과가 있는지를 고민해보자.


네가 가던 그날은

- 김춘수 -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위 작품의 화자는 '나'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청자인 '너'에게 전하고 있다. 이런 형식을 흔히 대화체 또는 말을 건네는 방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청자는 현재 '나'의 앞에 없다. 따라서 독백조의 시로도 읽힌다. 이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표현 방식에 있다. 우선

㉠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이 부분에서 화자는 자신의 가슴(마음)을 흔들리는 풀잎에 비유하고 있다. 정확히는 직유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가만히 '떨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만약 수능 문제라면 아래와 같이 설명할 것이다.

직유법을 활용하여 상처받아 떨고 있는 화자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수험생이라면 이게 '직유법'이 맞는지 확인하고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더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바로 이 문장이 <형식 + 내용>으로 돼있다는 사실 말이다. "~을 활용하여(통해) -하고 있다."의 고전적인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여 만든 답지에서 학생들은 왜 형식적인 부분만을 확인하고 찾으려는 걸까? 무언가를 확실하게 하고 싶은 충동이나 지금까지의 수업 내용 때문은 아닐까?

이제 좀더 세부적인 고민을 해 보자.

내용없는 형식없고, 형식없는 내용없다.


내용과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독일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내용과 형식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다. 내용이 없는 글을 읽게 되면 맹목적인 태도를 지니지 않는 이상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형식이 없는 글에 많은 내용이 담긴다면 도무지 산만해서 글을 읽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내용과 형식은 하나인 것이다.

'~을 통해 (형식) + -하고 있다(내용)'의 관계를 확인했다면, 우선 내용을 먼저 검토할 일이다. 그러면 굳이 작품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주제만 고민하더라도 옳고 그름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머지를 확인한다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 매우 감각적인 표현이네. 게다가 '하늘'을 '그림'에 빗대고 있어. 이건 너무 아름다웠던 환경에서 겪었던 이별의 아픔을 부각시키는 건 아닐까?

비유와 감각적 표현을 활용하여 이별을 대하는 화자의 정서를 부각시키고 있다.

㉢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 가을에 가지 끝에서 눈물처럼 떨어지는 건 '낙엽'이지. 그럼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눈물을 흘리는 모습과 빗댄 거야. 그렇담, '이별로 인한 아쉬움과 슬픔'을 표현했다고 봐야겠어.

대상을 의인화하여 상황을 대하는 화자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 이건 앞선 ㉡과 매우 유사하군. 인간과 자연의 대조를 통해 이별의 슬픔을 부각시키는 객관적 상관물을 활용한 거야.

인간과 자연을 대비하여 상황을 대하는 화자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 정말 감각적이군. 단풍잎을 불에 타는 모습에 빗댔잖아.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화자가 느끼는 고통을 형상화하고 있다.

㉥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 슬픈 마음을 구체화하기 위해 가슴이 눈물에 젖었다고 표현한 거야.

이별의 슬픔을 드러내기 위해 감각적인 시어를 활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장을 만들 때 반드시 출제하는 분들이 신경쓰는 부분은 내용적인 측면, 즉 글의 주제에서 어긋나지는 않는가이다. 가령 ㉣을 <자연을 의인화하여 화자의 슬픔이 진정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표현했다면 분명 주제에 어긋나는 선택지가 된다. 부정 발문이라면 이게 답이 될 것이다.


내용없는 형식없고, 형식없는 내용없다. 내용은 있지만 형식이 없으면 산만하고, 형식은 있지만 내용이 없으면 공허하다.


내용과 형식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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