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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을 나는 백구 Jan 24. 2023

말할 수 있는 비밀 1-(5)

감정의 흐름

시상(詩想)이란 시에 나타난 사상이나 감정을 말한다. 만약 '시상을 다듬다.'라는 말을 들었다면 이때는 '시를 짓기 전에 하는 구상'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시에 담긴 시인의 생각, 즉 '주제'를 말한다. 따라서 '시상전개'는 주제를 이끌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복받쳐 오르는 분노, 뜨겁게 치솟는 열정, 행복한 사랑의 느낌, 아련한 추억에 대한 그리움, 이러한 것들이 시를 만드는 중요한 원천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들을 마구 쏟아놓는다고 모두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시상(詩想)을 시 속에 펼쳐내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는다. 자신의 감정을 앞에 내세울 것인지, 뒤로 숨길 것인지, 소재들의 배열은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떠한 순서로 생각을 풀어낼 것인지 끊임 없이 고민한다. 이러한 고민들 끝에 결국 아름답게 조직되고 배열된 한 편의 시가 완성된다. 이렇게 시 속에서 시인의 생각과 감정이 나름대로의 질서를 통해 배열되는 것을 ‘시상 전개’라고 한다. 물론 시상이 전개되는 방식은 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광야

                                                - 이육사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는 '까마득한 날’이라는 태고의 시간부터 시상이 전개된다. 1~3연에서는 하늘이 처음 열리고, 그 무엇도 이곳을 ' 범(犯)하던 못하'는 순결한 모습과 역사가 시작되던 아득한 과거를 노래함으로써  이 광야가 얼마나 신성한 곳이었는가를 확인한다. 그런데 4연에서 '눈 내리'는 현재의 모습을 통해 지금이 가혹한 시련의 시기임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는 자라고 자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5연에서는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목놓아 부르는 노래'를 상상하며 미래의 소망을 언급한다.

과거에서 현재, 다시 현재에서 미래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청노루

                                                       - 박목월 -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화자는 현실에는 존재하기 어려운 가공의 공간을 묘사한다. '푸른 구름의 절'과 '보랏빛 산', '파란색의 노루'를 언급하며 환상적이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언급한다. 그러다 호흡이 가빠지면서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 두 구비'로 시선을 옮긴다. 마치 카메라를 빠르게 줌인하는 것처럼 나뭇잎 하나 하나를 상상하고 있다. 결국에는 '청노루'의 눈속에 비친 '구름'까지 묘사하게 된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표현이다. 공간을 옮기는 시선 처리가 일품이다.

  잠시만이라도 몸을 의지할 편안한 곳을 찾기 어려운 현대인에게 상상 속의 공간과 대상을 언급하여 평화와 휴식과 고요와 화해의 세계를 보여주는 시다. 작품 속 화자는 멀리서 바라보는 산 속의 절과 점점 가까워지는 나뭇잎, 가장 근접한 장면인 노루의 눈망울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원경에서 근경으로 시선을 이동하며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원경에서 근경으로 공간을 이동하고 있다.



동백(冬柏)

                                         - 정훈 -


백설(白雪)이 눈부신

하늘 한 모서리


다홍으로

불이 붙는다.


차가울수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그 뉘를 사모하기에

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 피는가.


  작품 속 화자는 흰 눈과 푸른 하늘이 맞닿은 공간에 붉게 피어난 꽃을 보고 있다. 다분히 감각적인 묘사다. 색채 대비도 두드러져 꽃잎을 강렬하게 형상화하는 효과를 얻는다. 이제 화자는 꽃의 색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불꽃'을 연상하게 된다. 제1,2연은 백설과 그 속에 핀 동백꽃의 모습을 묘사하였고, 제3,4연은 그러한 경치를 보며 느낀 서정(抒情)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전형적인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시상 전개다.

 

먼저 경치를 묘사하고 나중에 느낌을 드러낸다. 선경후정(先景後情)



묘지송

                                                                                  - 박두진 -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동시에 준다. '묘지'하면 떠오르는 슬픔, 공포, 허무 등의 감정을 뛰어넘어 '죽음'을 '부활'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3연에 주목해야 한다. 1연과 2연의 역설적 상황이 '안식과 부활의 죽음'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4연은 이 시의 주제를 담고 있다. 잔디 사이에 할미꽃이 피었고 멧새도 우는, 봄볕이 포근한 무덤이 더 없이 따뜻하고 정겹다. 그곳에 누워 있는 주검들은 차라리 행복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기승전결(起承轉結)은
시상이 전환되고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는 부분에
주제가 집중된다.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A]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B]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B]에 비추어 [A]를 평가할 때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내면세계로 몰입하는 계기가 되는군.

② 낯선 세계를 동경하는 계기가 되는군.

③ 인식과 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되는군.

④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계기가 되는군.

⑤ 이상과 현실이 타협하는 계기가 되는군.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을 실감나게 표현한 시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앉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초조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는 시작한다. 절실한 심정이지만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릴 뿐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극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5행에서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는 표현을 통해 시적 화자의 인식과 태도가 한층 적극적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다리며 간다'는 역설적인 표현 속에서 화자의 의지가 드러난다. 화자의 정서와 태도가 변화되는 추이를 따라 시상이 전개된 예라고 할 수 있다.

정답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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