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인생의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
서른네 살의 내가 살아가는 동안 세 번의 장례식을 겪었다.
첫 번째는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아빠의 동생인 막내 삼촌의 죽음이었고, 당시 다섯 살이던 나에게 그 장례식은 아주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기억나는 것은 시골집에 식구들이 모여 아무 말 없이 숨죽여 울던 장면과
어린 내가 엄마 무릎에 앉아 왜 다들 울고 있는지 계속 묻고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것
그 이후로 아빠 지갑 속엔 젊은 시절의 삼촌의 사진이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고3 수험생이던 여름날 할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그 시골 장례식장의 황량한 인테리어, 썰렁한 온도, 싸구려 육개장의 맛이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남아있다.
서울에서 남원까지 고속도로를 내달려 자정이 넘었을 즈음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들 80살이 넘은 할아버지의 장례는 호상이라던데 세상에 사람이 죽는데 좋은 죽음 왠 황당한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2박 3일 내내 울었다.
아빠의 고향 친구들이 비현실적으로 화려한 장식을 한 꽃상여를 매고 마을 뒷산 비탈을 올랐다.
네모나게 파진 묫자리에 관을 내려놓던 순간 3일 내내 울지 않던 삼 형제의 눈물이 터졌고,
듣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 사과의 말들만 무덤가에 맴돌았다.
할아버지의 남겨진 자식들이 흙을 한 삽씩 퍼 관을 덮는 것으로 두 번째 장례식이 마무리되었다.
세 번째 장례식은 3년 전 스물다섯의 사촌동생의 죽음이었다.
나는 더 이상 죽은 사람을 위해 울지 않았고, 죽음에서 빗겨나 남겨진 사람들이 불쌍해 울었다.
사촌동생의 이름을 지어준 아빠는 어린 나정이가 죽고 나서 자기가 이름을 잘 못 지어서가 아닐까 한자로 된 이름을 옥편에서 몇 번이고 찾아보았다고 한다.
젊은 날의 아빠가 사랑한 사람 몇몇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나이 든 아빠에게도 남겨진 사람이 되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빠의 황망한 마음을 가늠할 수 없어 슬픈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