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다.
머리가 울렸다. 창문으로 밝아지는 하늘이 부서져 들어왔다. 새벽이 방을 가득 채워 내게 짙은 패배감을 안겼다. 나는 또 밤을 샜다.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고, 자신에게 추한 꼴만 보이고 만 것이다. 계속 반복되는 과제의 틈 사이에서, 어떻게든 그마저도 미루려 아무 영화나 틀어 놓기 시작했다. 나쁜 습관이다. 해야 할일은 마음에서 멀어지고, 보고 싶었지만 미뤄왔던 영화에나 집중하게 되었다. 아침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파동은 몸을 울리고 온몸이 차가워졌다 뜨거워졌다를 반복했다. 죄책감인지 공포감인지 모를 감정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왜 할 일을 미뤄버리는지 알고 있다.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신나서 당장이라도 시작할 힘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 학기 내내, 아무런 성취감도 느끼지 못한채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았을 뿐이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 자체가 사라져 버린 채, 매일같이 책상 앞에 붙어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고, 침대에도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나 바깥을 쳐다보기도 했다. 미쳐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채우던 공허함이 새어나와 어느새 방을 채웠다. 그 공허를 들어마시고 내쉬면서 그와 하나가 되었다.
종래에는 미뤄왔던 영화들을 전부 봐버렸다. 해야 할일을 대신해 내 시간을 빼앗을만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다. 어떤 콘텐츠도 상관 없었다. 뭐라도 소비하고 싶었다. 하루종일 스트리밍 서비스를 돌려가며 틀어 놓았다. 오프라인인 시간은 단 한시간도 없었다. 잠에서 깬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무언가를 소비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사실 그냥 가만히 있지를 못했는지도 모른다.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냥 눕고만 싶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내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걸 채우는 방식을 모를 뿐이었다.
알 수 없는 비움과 채움, 그리고 사라짐으로 이어지는 트랙을 돌고 만 있는 나를 발견했다. 벗어날 수 있지만, 벗어나지 않는다. 어영부영 학기는 끝이 났지만, 어떤 종결감도 없이 내던져 졌다. 할 일이 사라진건 기뻤지만, 더 생긴 시간으로 할게 없었다. 늘어지는 시간에 나는 배경과 하나가 되었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벽지 위에 흩뿌려진 빛 줄기를 구경했다. 집안의 고요한 공기를 겨우 마시며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집의 가구처럼, 나는 방의 주인이 아닌 구성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어느날, 나는 가만히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가고 말았다. 참을 수 없는 어떤 느낌을 좇아 나갔다. 피부에 와닿는 바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바닥을 디디는 발걸음의 무게감이 생경했다. 바깥의 공기는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었다. 살아있었다. 정처없이 걷기 시작했다. 나뭇잎 틈으로 쏟아지는 빛이 수놓은 길들을 걸었다. 눈꺼풀을 덮는 햇빛이 따뜻하다는걸 새로이 느꼈다. 빛에도 온도가 있었다는걸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걸 기억해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피로가 몰려왔다.
바깥의 냄새를 잔뜩 묻히고 돌아온 나는 더이상 스며들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도 자꾸 툭, 하고 튀어나와 버리는 것이었다. 물렁하고 흐릿하게 남아있던 나의 잔재가 다시 뭉쳐지고 있었다. 뭔가 새로운게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