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찰나의 여름들

여름을 기다리며 기억 속의 계절을 곱씹는다.

by 이야

매미들의 울음소리를 의식하는 그 순간, 여름이 시작되었구나 하고 느낀다. 그런 계절의 흐름을 경험하게 되면, 아무리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계절이라고 해도 어딘가 설레고 간질거리는 기분이 든다. 새 책의 첫줄을 읽을때의 순간처럼, 낯선 나라의 활주로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처럼, 오랫동안 차를 타고 드디어 도착한 바다를 처음보는 순간처럼.


무성하게 자라난 거리의 나무들이 아침 햇빛을 받아 빛날때의 아름다움을 기억한다. 여름의 나무들은 장마비를 머금고 어느때보다 쑥쑥자란다. 여린 봄의 잎사귀들이 점점 짙어지며 커가는 모습을 보면, 항상 지나다니던 길이라도 새로워 보인다. 나무 아래에 서서 해를 피하면 잎 사이사이로 흘러나온 빛이 바닥에 무늬를 그린다. 괜히 손을 들어 이리저리 움직여 본다. 손등을 타고 빛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있자면, 노란빛이 감도는 피부색이 새삼 아름다워 보인다. 여름의 찬란한 햇빛아래, 모든것이 빛난다.


한여름, 지하철을 타고 한강위를 지났을때의 반짝거리는 물결을 기억한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 함께 그 반짝임을 바라본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해지는 한강이 창문으로 보일때, 저절로 모두가 창밖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연의 당연한 아름다움이 모두를 사로잡는다.


영국에서의 일년간 만났던, 한 계절의 여름을 기억한다. 햇빛이 내리쬐는 복도에 걸어 놓은 세탁물이 마르고 있다. 그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 계단에 앉으면, 옆집의 지붕들이 보이고 멀리 폐허에 가까운 고성이 보인다. 그 모든것의 배경에는 시리도록 푸른, 맑은 하늘이 자리한다. 코 끝에 감도는 깨끗한 빨래 냄새. 내 방의 천창밑에 누워 하염없이 지나가는 뭉게구름을 구경한다. 이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나를 감싼다. 열어둔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눈을 감으면 몸이 붕 뜨는것도 같다. 이대로 음악 섞인 바람에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 마을을 둘러싸는 부드러운 언덕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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