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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Aug 02. 2022

09 시간은 조금도 멈춰주지 않는다




피하고 싶었던 8월이다. 마지막 방학의 초라한 엔딩이 모습을 드러낸다. 개강까지 한 달. 슬럼프가 시작되었고, 나는 제대로 그리지도 쓰지도 못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종일 누워만 있고 싶다. 하지만 계속해서 남은 날들을 세게만 된다. 이 시간을 이렇게 허비할 정도의 여유를 부릴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쿡쿡 찌른다.




어릴 때는 그런 상상을 많이 했다. 시간을 멈추고 뭐든 마음대로 하는 상상. 그때는 시험을 잘 보고 싶어서 그런 상상을 했지만, 지금은 그냥 시간이 가지 않았으면 해 그런 생각을 문득 한다. 지금이 만족스럽거나 행복한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작용하는 중이다. 이 여름을 완벽히 박제할 수 있다면, 생명력 없는 모형이 된다고 해도 이 디오라마 안에 있고 싶다. 어떤 것도 될 자신이 없는 나는 밀려나듯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데, 그게 못내 두렵다. 이대로 모든 게 멈춰버린다면 좋을 텐데. 이 여름날이 멈춰 서서 오늘이 영원이 된다면. 하지만 지금 시간을 멈춘다고 해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다시금 시간선 상에 설 자신은 없다.


돌이켜 보면,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순간들은 언제나 불행하던 시기였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건 그저 시간이 더 많았으면, 혹은 이다음의 순간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름답거나 행복하거나 하는 순간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마저도 그때 행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은 돌이키면 돌이킬수록 거짓으로 점철되니, 으레 행복하다고 생각될 만한 순간들을 행복하다고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운 밤에는 영원한 밤을, 새 학기가 두려운 겨울에는 영원한 겨울을 바랐다. 지루한 평화가 끝도 없이 이어져서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대로 아무도 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도망치고 싶은 날들이 쭉 이어지기만 해서, 나는 하루씩 살게 되었다. 일단 오늘을 버티고 내일은 생각하지 말자고 매일 밤 다짐한다. 하지만 기어코 오고 만 내일의 아침마다 침대에서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집에 고립되기 시작한 2년 전부터 일정한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게 되었다. 아홉 시에 일어나 세수하고 이불을 정리한다. 열 시 반쯤이면 컴퓨터를 켜던 스케치북을 피던 뭔가를 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저녁 여덟 시가 넘어가면 슬슬 집중력이 바닥나고, 열두 시에 불을 끈다. 겨우 넘긴 어제처럼 오늘도 넘기기 위해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오늘이 어제 같다면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지나가 줄 것 같아서.


때로는 정말 어디로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집을 나선다. 마구 뛰고 싶다. 소리치고 싶다. 답답하고 토할 것 같고 이 몸을 찢어버리고 사라지고 싶다. 그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느리게 다른 사람이 가득한 산책로를 걷고, 계절에 변한 나무를 쳐다본다. 뭘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실망하고 만다. 어디로 가든 내가 가기에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 나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지, 의미가 불명확한 원망을 쏟아낸다. 갑작스러운 절망감이 엄습한다. 울지 않으려 이를 깨문다. 일탈에 대한 욕망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결국 집에 가는 길을 택한다.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 몸을 말면 그대로 작아져 사라졌으면 좋겠다. 시간과 공간에서 똑 떨어져 나와 우주의 먼지로 흩어졌으면 좋겠다. 느끼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지나갔고, 오늘이 그렇게 끝나가고 있다. 전부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 내가 붙잡히는 건 끈적거리고 까만 이따위 생각뿐이었다. 그런 건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달라붙는다. 그렇게 전부 검어져 밤하늘의 검은 공간이 된다면 좋을 텐데. 그 대신 블랙홀이 되어버린 기분을 떨칠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어떤 사건으로 슬퍼지지 않는다. 어째서 행복하지 않은지 고민하지 않는다. 시간의 컨베이어 벨트에 누워서 어딘가로 가버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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