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정말로 이대로 지구가 끝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물에 잠겨 버리든지 불에 타버리든지 전쟁에 가루가 되어버리든지. 지구는 산산조각이 나고 인류 문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세상의 탄생을 보지 못했으니 끝이라도 보고 싶기는 하다. 지구에서 인간의 삶이 어떤 엔딩을 맞이할지 궁금해지고는 한다.
나는 두 번의 지구 종말론을 넘겼다. 첫 번째는 태어나고 몇 년 뒤, 1999년에서 2000년을 넘어가는 날 밤. 1월 1일이 오는 순간 일명 '밀레니엄 버그'로 전산이 마비되고 국가를 멸망시킬 정도의 폭탄이 통제 불능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누군가는 웃어넘겼고 누군가는 밤을 새웠으며 나는 말도 못 하는 아기에 불과했다. 아무 일도 없이 2000년은 오고 갔다. 두 번째는 2012년. 고대 문명의 달력이었는지 누군가의 예언이었는지 이런저런 추측이 겹쳐 2012년 12월 21일이라는 날짜가 등장했다. 그때의 나는 중학생.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도 하는데 특별한 걸 해야 하나 싶다가도, 어차피 망할 일은 없겠다는 생각에 평소처럼 보냈다. 그러면서도 내심 내일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은 했던 것 같다. 결국 내일은 오늘이, 오늘은 어제가 되었고 2012년도 그렇게 지나갔다.
2012년의 밤을 꽤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사실은 설렘이었던 것은 아닌지 재고한다. 나는 궁금한 게 많고, 생각도 많다. 세상과 시간의 시작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모든 것의 끝이 어떨지도 상상해 본다. 더 이상 예전 같은 종말론은 없어 보인다. 요즘의 종말론은 예언이나 오래된 달력, 책의 구절에서 오지 않는다. 수많은 그래프, 뉴스, 시위 현장에서 온다. 이대로 가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마시는 공기에, 세상을 채우는 소리에, 내리쬐는 햇빛에 만연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말도 많다. 인간은 이미 지구를 망쳐버렸고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오래 살지 않은 나도 매년 계절과 날씨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이런 여름은 처음이야. 이런 겨울은 처음이야. 지난 몇 년간 그런 생각을 해왔다. 이상하게 따뜻한 겨울이나 장마철이 사라진 여름. 뭔가 이상해진 것인지 내가 세상을 더 예민하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세상이 무너지고 불타는 것을 보고 싶은지, 나의 예상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 그저 호기심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 끝이 멀지 않았다면 느리고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한 번에 터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떤 욕망인지는 알 수 없다.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나의 삶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 교차하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일어난 모든 일이 남지는 않는다. 어떤 일들은 오래 남아 이야기가 되지만, 어떤 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물려받은 꿈이 나를 옥죄고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세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불명의 불안이 여전히 존재함을 깨닫는다. 대서사시의 주인공이 되고만 싶은, 근거 없는 욕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배드 엔딩이 예정되었다면 아름답게 쓰인 비극이었으면 좋겠다는 이기심을 깨닫는다.
고등학생의 나와 친구들은 자주 인류 멸망을 꿈꿨다. 이대로 다 끝나버렸으면. 매일을 견디기 어려운 시절에는 그런 생각을 가끔 하고는 했다. 나를 밀어붙이기에도 힘들어서 다른 사람들의 삶과 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끝없는 경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학에 합격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말을 쉽게 들었다. 남들이 살고 싶은지는 관심 없고 이대로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고는 했다. 나만 망하면 나만 대학에 가지 못하고 나만 패배하는 꼴일 테니까. 그럴 바에 세상 자체가 전부 망해버려서 대학에 갈 필요도 가능성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의 내가 가끔 생각하는 인류의 끝도 나의 삶이 완전히 변해버렸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된 것일까?
인류가 끝나고 지구가 사라질 가능성을 생각하고 마는 것은 왜일까. 이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것인지, 나에 대한 혐오감인지, 이미 되돌리기는 늦었다는 포기인지, 미래 세대의 책임에 대한 부담감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멸망의 기시감은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세상의 틈새로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그런 공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