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방충망에 붙은 매미 소리에 깨고 만다. 제발 지금이라도 날아가 달라고 속으로 빌어야 할 정도의 소리는 더 자는 것을 포기할 때쯤 그친다. 멀고 흐린 매미 소리는 여름의 정취를 불러일으키지만, 내방 창문에 붙어 목청껏 소리치는 매미 소리는 참을 수 없다.
개강만은 피하고 싶지만, 가을과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의 변화는 반갑다. 어떤 계절이든 간에 한 달쯤 지나면 질려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여름이 다소 지긋지긋하고 가을이 좀 기다려진다. 서늘해진 공기에 따뜻한 음료를 마시고, 몸을 잘 감싸주는 옷을 입고, 물들어 떨어지는 낙엽을 밟는다. 세상은 수많은 종류의 갈색. 하늘은 왠지 저 멀리 있는 것만 같고, 깜짝 놀랄 정도로 맑은 하늘이 지속된다. 비가 오면 바닥에 떨어진 낙엽에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 물론 그런 낭만적인 이미지는 해야 할 것과 가야 할 곳에 금방 뒷전이 되지만. 짧은 가을이 지나면 공기에서 차가운 냄새가 난다. 겨울은 가끔 아침에 우는 까치 말고는 시종일관 조용하다. 하늘은 파랬다가 회색이었다가를 반복하고 결국 눈이 온다. 눈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쌓인 눈은 소리를 머금고 내려앉는다. 세상은 온통 희고, 밝고, 조용해진다. 매미소리와 빗소리에 질린 여름의 나는 자주 그런 정적이 기다려진다.
봄과 달리 가을 학기는 처지고 지친다. 해는 짧아져서 통학길이 자주 어두워진다. 집에 돌아오면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 왠지 밤이 되어버린다. 분명히 할 일은 있지만 할 생각은 들지 않고, 그렇게 OT 날부터 받아온 과제는 쌓여만 간다. 하지만 밖은 어둡고, 나는 조금 춥다. 해가 짧아지면 어둠에 적응하기는커녕 잠만 많아진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 이불속으로 파고들기를 반복한다. 게으름에는 이유도 변명도 참 다양하다. 부지런함에는 아무 사족도 붙이지 않는데 말이다. 눈을 반쯤 뜨고 화면을 쳐다보고 있으면 이불속은 체온으로 데워져 뜨끈하고 머릿속은 점점 비어 간다. 불안까지 미뤄버리고 누워서 대충 뭘 쳐다보고만 있으면 사실 세상은 꽤 조용하고 평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든다. 더위에 늘어지는 여름과 달리 가을부터의 나는 추위에 웅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때로는 여름임에도 웅크리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분명히 있는 옷인데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오랜만에 구석에 처박혀 있던 스웨터나 카디건 따위를 만지작 거리며 향수에 젖었다. 춥고 건조한 대륙의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던 그때를 기억한다. 가볍기만 한 여름 이불에 잠 못 들 때. 피부에 와닿는 선풍기 바람이 거슬릴 때. 온몸을 감싸는 습기에 지칠 때. 강렬한 햇빛에 잠긴 세상이 눈부실 때. 이 계절이 지나버리기를 바란다. 매일 밤 쉽게 잠들지 못할 때. 심장이 뛰어 가만히 앉아있기 힘들 때.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상황을 견뎌야만 할 때.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지금의 견디기 힘든 현재가 전부 먼 과거가 되기를 바란다. 과거가 된 고통은 빛바랜다.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들을 정말로 떠나보내고 나면 당황스럽다. 정말 시간이 지나고 있고, 삶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 건 진창에서 빠져나오고 나서야 깨닫는다.
정말 힘들었다고 생각하던 시기에서 나는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것 같다. 여전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어떻게 힘든 순간을 다독이며 지나야 할지 모르고, 어떻게 나를 위로해야 하는지 모른다. 시간은 지나가버리지만 나는 자라지 않는다. 어느 순간에 멈춘 것만 같은데 그게 언제인지 알 수 없다. 몸도 머리도 자라지는 않는다. 그저 넓어지고 있는 것도 같다. 으레 수직적인 상승으로 대변되는 '성장'의 개념과 나의 변화는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더 많은 것을 흡수하고 많은 것을 시도하면서도 결국 같은 인간으로 남게 되는 것은 왜일까. 면적을 넓히고는 있지만 결국 그 중심의 한 점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기 때문이겠지. 나는 종이에 떨어뜨린 잉크가 퍼지는 것처럼 '성장'하고 있다. 그런 것도 성장이라고 부를 수나 있다면 말이다.
어떻게든 끝나는 여름을 붙들고 싶다. 하지만 가차 없는 시간의 흐름은 나를 앞으로, 앞으로 밀어낸다. 세상은 춥고 어두워질 것이고 나는 그렇게 다음 여름으로, 또 다음 여름으로 떠난다.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