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 Aug 23. 2022

16 수강 신청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마지막 학기의 시간표가 정해졌다. 운과 클릭 속도로만 정해지는 것 치고는 선방했다고 믿고 싶다. 아니, 5년 차쯤 되니 그냥 쉽게 만족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원하는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다고, 듣지 못한다고 앞으로의 삶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믿으며 나는 플랜 B의 시간표에 만족한다.




사실, 항상 플랜 B를 따라갔던 것 같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전부 2지망이었으니까. 만족했지만 그뿐이었다. 플랜 A를 따라갔다고 해서 내가 더 행복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믿음인 동시에 타협이다. 1지망은 언제나 사실은 도달할 자신이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포기한 목표들을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위해 끌고 다녔다. 솔직할 때가 아니었기에 그저 따랐을 뿐, 사실 나는 결과를 알고 있었다. 내 포기의 결과로 다른 사람들만 당황스러워했을 뿐이었다. 결과는 그렇기에 반쯤의 실패, 사실은 성공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척, 이 정도면 만족한 척, 어쩔 수 없는 척했다. 정해진 것들은 운명이고 동시에 저주처럼 나를 옭아맨다. 나는 짐짓 행복한 듯 보이려 노력해 왔다. 계속 나 자신에게 실망만 하면서.


나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내가 세운 목표의 정점을 달성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 말이다. 나의 최선은 언제나 대안으로 귀결되었다. 그게 최선이라고 믿고 싶지 않아서 나의 평범함에, 열정 없음에, 타고나지 않음에 집중했다. 아무도 아니고 싶지만 동시에 위대한 누군가가 되고 싶은 모순으로 몸을 감싸고, 내게 깊은 상처를 내어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인생은 거지 같지만 살만해. 나는 아무것도 안 되겠지만 괜찮아. 소리 없이 죽겠지만 만족해. 그런 말들을 나누면서도 속은 불타 없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모른다.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를 떨쳐 내는 법도 모른다. 인간의 불완전함이야말로 그를 완성한다고 생각하지만, 왜 나의 불완전함은 받아들일 수 없는지 부쩍 궁금하다.


실패에 아무렇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실패할 가능성조차 만들지 않으려 애쓰게 되는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 도 - 도 아닌 = 이다. 지금 있는 걸 망치고 싶지 않다는 공포가 의지와 이성을 갉아먹는다. 변화 없이 나아가기만 하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등 떠밀리는 것임을 안다. 성공하지 못해야 발전할 수 있고 다음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나 자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 어떤 것도 믿기 힘들다. 실패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믿지 못하기에 어떤 것도 시도하지 못한다. 우왕좌왕하고 뭉그적거리고 그만둬버린다. 지금껏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만큼의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으니 불안은 더해지기만 한다. 언제든지 침몰할 수 있다. 언제든지 말이다.


2지망이어도 지망은 지망이었다. 어쩌면 나는 패배한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끔찍한 생각이다. 어떤 언덕도, 허들도, 늪지도 넘어본 적 없었음을. 어떤 위기도, 어려움도, 무너짐도 경험하지 못했음을. 깨닫는 것인지 믿게 되는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침습한다. 내 삶의 의미는 이미 희미하지만 나를 들여다볼수록 투명해진다. 두둥실 떠서 시간의 바람을 타고 끝까지 가버린다면, 죽어버린다면. 그래도 나는 아무런 후회도 없는 척할지 모른다. 이만한 삶이면 괜찮았다고 내 어깨를 토닥이고 심장이 멎는 것을 느낄 테지. 나의 평범함에 실망하면서 평범해지려 발버둥 치다 죽는 것. 그만하면 된 것인지 생각보다 절망적인지 몇 번이고 곱씹어본다.


애초에 계획 자체가 없었던 사람처럼 군다. 그냥 이렇게 됐어. 괜찮은 것 같아. 사실 뭘 할지는 모르겠어. 정한 길을 걷고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내 미래를 계획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헤매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도 내게 그렇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시선을 떨칠 줄 모른다. 없는 시선을 상상해내는 머릿속에서 도망치고 싶다. 뇌의 전원을 끄고 드러눕고 싶다. 하지만 왠지 더 괜찮고 가치 있는 사람이 돼야 만 할 것 같아서. 세상에 한 사람으로 있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멈추지는 못한다.




이 여름이 끝나기까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날들만이 남았다. 날씨는 여전히 덥고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나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변하지도 않았으며 이제는 그럴 시간도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15 여행은 목적지가 가장 지루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