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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 Jul 25. 2024

[나의 방황일지] 빈털터리인데 마음은 일론머스크  

통장잔고 0, 세네갈에서의 새로운 시작

사진첩을 하나씩 정리하기로 했다. 순서는 모르겠다. 사진이나 나의 기억 조각을 조금씩 정리하다 보면 방황하는 나의 마음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을까 싶다. 몇 년 전인데 이제는 지명도 그때 만났던 사람의 이름도 희미해진다. 이 사진을 꽤나 좋아한다.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주제에 행복하게 웃는 순수했던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3년을 일하고 오랫동안 꿈꿨던 NGO에 지원했다. 지방에서 혼자 서울로 올라가 별별 서러움 다 겪었는데, 그럼에도 무조건 3년은 넘게 일해야겠다는 목표의식이 있었다. 내가 일하고 싶었던 NGO의 최소 지원자격이었다. 무서웠던 선배는 나에게 매번 "시골로 돌아가!!!"를 남발했다. 나는 "시골은 아니에요."라고 대답했다가 수액 창고로 끌려가기 일쑤였다. 내가 가고 싶었던 NGO에는 당시에 떨어졌다. 쉬는 날이면 매번 도서관에 처박혀서 영어나 프랑스어 공부를 했었는데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만 같았다. 결국은 비슷한 활동을 하는 곳에 지원했는데 덜컥 합격했다. 내가 활동할 곳은 세네갈이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대학교 때 UN모의회의에서 세네갈 대표팀을 했었다. 발표를 준비하면서 어설프게나마 세네갈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 이것 참 운명이군 했다.


복잡했던 서울 생활과 중환자실 생활을 청산하고 세네갈로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왔다. 첫 활동을 시작하기 전 내 통장에 든 것은 몇천 정도 되었는데 마우스 클릭 한 번에 학자금 대출로 빠졌다. 허무했다.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여름이었는데 에어컨도 없던 낡은 고향집의 부엌에서 컴퓨터를 켜고 앉았다. 마우스 클릭 전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는데 긴장해서인지 날씨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딸깍. 한 번에 통장잔고가 0원이 되었다. 살짝 눈물이 났던 거 같다. 개고생 하며 나를 간호사로 만들었던 4년의 시간은 10배는 개고생 했던 3년의 간호사 근무로 갚았다. 다시 한번 벌거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빈털터리인데 평소 받던 월급 반의 반도 안 받는 활동을 하러 떠난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설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조금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닐 수도, 또는 그저 도피처 일수도 있지만 학창 시절부터 꿈꿔오던 일이었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만약 저 때 내가 세네갈을 가지 않고, 대학병원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 번씩 생각한다. 안정적인 직장, 사회 초년생치고는 꽤나 높았던 월급, 3년간 만났던 남자친구. 어쩌면 나는 서울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이 바랬던 완벽한 그림이다.


사는 것은 어쩌면 매번 선택의 순간을 겪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가 직접 한 선택이라면 후회는 없다. 결과에 내 스스로 책임을 지면 될 뿐. 물론 불안한 마음도 구석에 웅크리고 언제든지 덩치가 커질 준비 중이다. 내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빈털터리인데 마음은 일론 머스크 뺨친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루이야드 키플링의 시에서 발치

만일 모든 사람이 너를 의심할 때
너 자신은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다면

만일 전 생애를 바친 일이 무너지더라고
몸을 굽히고서 그걸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한 번쯤은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걸 걸고
내기를 할 수 있다면
그래서 다 잃고서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세네갈에서 나의 베프였던, 까띠와 함께. 그녀는 나보다 3살 많았지만 2명의 아이가 있었다. 세네갈에서 드물게 영어, 프랑스어를 하고, 이혼을 했다. 누구보다 강인한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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