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전시회를 보고 나와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전시회에서 찍은 사진을 챙겨 보다가 지난날 풍경까지 보았다. 노을이 아름다운 바닷가였다.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다 보면 병이 나을지 모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닷가로 갔다. 어떤 약도 듣지 않았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병은 낫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잠깐이나마 행복할 수 있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혼자 바닷가에 가본 적이 있다. 그림자 하고라도 걷고 싶어서. 막상 도착해서는 차 안에서 한참 울다가 돌아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끔 궁금했다. 이젠 그곳에 가도 좀 담담하지 않을까.
며칠 전이었다. 카톡이 카톡거렸다.
"선생님 저 한국에 들어왔어요."
포르투갈 파티마 성당에서 나를 위해 기도한다던 사람이다.
"언제 돌아왔어요?"
"며칠 되었어요. 혹시 시간 되시면 저랑 그림 보러 가지 않으실래요?"
양재에 있는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샤갈. 달리. 뷔페 展>을 보러 아내와 함께 다녀온 적이 있다.
"예술의 전당에서 요즘은 뭐 하나요?"
"모르겠어요. 거긴. 저는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하는 전시회 보고 싶어서요. 선생님 시간 되시면 같이 가실래요?"
"주제가 뭔데요?"
"전시회 제목이 <신여성 도착하다>이고요. 근현대 한국화가들 작품들이에요. 그림만이 아니라 인쇄물도 전시되는 것 같고."
"재미있겠군요. 그런데 혹시 차 가지고 다니세요?"
"그런데요?"
"제가 요즘 정말 운전이 하기 싫어서요."
얼마 전 꽤 큰 충돌사고를 겪었다.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충격이 컸다. 그러고부터 운전이 하기 싫었다.
"댁이 어디세요?"
동선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돌아가면 되는 정도였으니. 한시에 만나서 덕수궁으로 갔다. 전시회장에서는 각자 다녔다. 그래야 마음대로 편하게 감상할 수 있으니. 다 보고 만나기로 한 곳으로 갔다. 내가 먼저 나온 모양이었다.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뒤적이다가 그만 추억에 빠져버린 것이다. 지금이라도 을왕리에 가면 안 될까?
오후 세시다. 지도에서 찾아보니 한 시간 십이 분이면 갈 수 있다. 조금 더 걸린다고 해도 네시 반이면 도착할 것이다. 해물칼국수를 먹고 해변가로 나서면 노을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거고.
"재미있으셨어요?"
파티마였다.
"힘들지 않아요? 잠깐 앉으세요."
앉으면서 물었다.
"이제 어디 가고 싶으세요?"
조금 망설여졌다. 늘 내가 묻던 말이다. 뭐 먹고 싶어? 어디 가고 싶어? 아내 투병이 시작된 뒤 몇 년 동안 나는 물었고 아내가 결정했다. 내 마음은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는 아내가 물었고 내가 대답했다. 그러면 자기도 좋다고 했다. 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아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감춘다는 걸 알았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아내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다시 질문을 받다니.